어두운 조명 속에서 매끈하고 검게 빛나는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쓸쓸하게 놓인 무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객석 어딘가에 나는 앉아있다. 왼쪽에는 미처 주인을 만나지 못한 빈자리가, 오른쪽에는 오늘 듣게 될 연주의 기대감에 찬듯한 어느 노신사의 낮은 중얼거림이 공연 시작 전의 미지근한 공기와 함께하고 흐르고 있다.
그렇게 데스크에서 받은 리플릿에 적힌 피아니스트의 소개글을 다 읽어갈 때쯤 무대에 조명이 밝혀지며 한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오늘 피아노 리사이틀의 주인공과 각별한 사이임을 밝히며 평소 주인공을 곁에서 지켜본 친분과 앞서 리허설을 먼저 관람한 경험을 바탕으로 관객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큐레이터로서 이 자리에 섰다고 한다.
7년 전 처음으로 기획되어 오늘 10회째 되는 이 콘서트를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장식하게 되었다는 조촐한 자축과 함께 공연 소개를 마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께서 첫 번째로 듣게 될 헨델의 건반악기를 위한 조곡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개발되기 이전에 쓰인 곡입니다."
"원래는 현을 뜯는 원리로 연주하는 하프시코드로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곡을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로 과연 연주해 낼 수 있을지 한번 들어볼까요?"
관중들의 박수와 함께 무대 뒤편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뒤로 묶은 새하얀 백발, 그에 대조되는 검고 반짝이는 셔츠와 스키니 한 바지, 그리고 날카로운 앵클부츠로 마무리한 주인공의 모습은 피아니스트로서는 꽤나 락시크한 느낌을 풍기며 무대를 가로지른다.
관중석을 향해 사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돋보기를 쓴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느릿하게 말아쥐었다가 편다. 연주 전에 손가락을 푸는 것인가 싶었던 순간 왼손은 이미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그 찰나의 무심한 태도에서 여유와 관록이 슬며시 새어 나오며 연주에 대한 기대감을 오르게 한다.
그렇게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이 출발한 헨델의 '유쾌한 대장간'이 점점 상승 곡선을 그리며 화사하고 청명하게 홀을 채워나가기 시작할 때쯤 오늘 준비된 피아노가 어째서 스타인웨이가 아닌 야마하였는지 그제야 납득이 된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만들어진 이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기에는 약간의 건조한 느낌과 함께 특유의 맑은 소리를 내는 야마하가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톡톡' 부러지고 '바삭바삭'한 느낌의 하프시코드의 음색을 굳이 흉내내기보다는 오히려 과감하게 서스테인 페달을 밟으며 표정 없는 얼굴로 피아노를 몰아붙인다. 그 결과 무수하게 나열되고 있는 수많은 음들이 서로의 영역에 조금씩 맞물리며 기분 좋은 무한궤도를 그려나가는 듯한 경치가 펼쳐졌다.
헨델을 시작으로 하이든 그리고 멘델스존까지 이어지는 연주. 마치 눈앞에 형형색색 각기 다른 보석들이 얽혀 들어간 커다란 만화경이 뱅글뱅글 돌아가는듯한 상상이 지어진다. 그 소리의 반짝임이 언제까지고 순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던 순간 어느새 오지 않았으면 했던 짧은 정적이 찾아오고 박수와 함께 인터미션이 주어진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너무 좋았죠?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2부에 예정된 순서는 라벨의 소나티네, 스크리아빈의 소나타 10번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이 애정해 마지않는 어느 선배님의 곡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일반 대중들이 듣기에 아주 이상하게 느껴지는 곡들도 있을 것 같아요. "
"하지만 왜 예술이란 아름다움만을 표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삶이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듯 예술 또한 아프고 슬프고 이상한 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기도 해요."
"그래서 오늘은 조명 담당에게 조명도 최대한 아주 이상한 색깔로 쏴달라고 부탁도 해놨어요"
(관객들의 웃음소리)
"아 그리고 특히 저는 스크리아빈 소나타의 둑! 둑! 하고 끝나는 마지막 두음절을 듣고 있자면 살충제를 맞고 땅에 떨어진 모기가 죽기 전에 다리를 두어 번 꿈틀거리는 모습이 생각나는데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관객들의 폭소와 함께 2부의 막이 오르며 주인공은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다.
과연 큐레이터가 표현한 대로 스크리아빈 소나타 10번이 특히 인상적이다. 헨델에서 느껴졌던 빈틈없이 빼곡하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선율은 온데간데없고 불규칙하게 나열된 메이저와 마이너 얽힘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밀어내며 도무지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군데군데 배치된 영문모를 정적은 곡이 가진 불안함을 더 증폭시키기도 했다. 홀을 수놓던 반짝이는 소리들 대신 다가오는 빛이란 빛은 다 흡수할 것만 같은 매캐한 검은색과 회색이 신음한다.
그러다가는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해 쓰러질 듯 분주하고 어수선하게 어디론가 질주하던 이 곡은 끝내 마치 희로애락을 모두 소진하고 삶의 여정이 끝나는 문턱으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더디게 다가가는 것처럼 서서히 느려지더니 결국 둑.. 둑... 하는 탁한 단말마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소리는 사라지고 헝클어진 새하얀 머리카락만이 연주의 격렬함을 여운한다.
묘한 기운이 흐르는 홀에는 잠시 후 앙코르곡으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사심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 관객에게 보내는 마지막 배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24. 10. 27 박종훈 리사이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