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헤드폰이 니 헤드폰이냐?
나는 얼마 전 오디오 페어 방문기 1등에 선정되어 고가의 무선 헤드폰을 상품으로 받은 적이 있다. 해당 헤드폰은 출시가격이 100만 원이 넘는 제품으로 가장 좋은 무선 헤드폰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음향기기 애호가들에게 꾸준한 사람을 받는 그런 제품이었다.
말 그대로 뜻밖의 선물이었다. 집으로 배송된 헤드폰 박스를 받아 들고 이게 웬 떡인가 하는 감흥에 한동안 젖었다. 그리고 박스의 비닐을 제거하기 위해 커터를 쥐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걸 요긴하게 사용할까? 그냥 팔아서 저금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 커터날을 집어 놓고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이때까진 알지 못했다. 흥미로운 욕망의 레이스가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은.
가질까? 말까?
그렇게 옷장에 넣어놓은 그 헤드폰은 마치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 반지처럼 자신의 비닐을 어서 벗기고 너에게의 귀속을 속행하라는 유혹의 말을 속삭였고 이성의 간달프는 지팡이를 들어 유혹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내 마음속 두 진영의 팽팽한 대립은 전쟁의 서막을 알려오고 있었다.
내가 헤드폰의 박스를 흔쾌히 개봉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무선이지만 기본적으로 부피가 커서 가지고 다니지 않을 확률이 높다.
2. 그렇다고 집에서 쓰자니 이미 유선 헤드폰을 가지고 있다.
3. 음질은 좋지만 귀에 땀이 차서 찝찝하고 목에 걸면 불편하다.
4. 경험상 오래 착용하고 있으면 경추에 무리가 간다.
끝.
내가 헤드폰을 바로 팔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갖고 싶다.
끝.
이성적으로 정리해 봤을 때 나는 이 헤드폰을 뒤도 돌아보지 말고 팔아야 했다. 하지만 손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이 갖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의 힘은 그만큼 대단했고 이 욕망이 앞으로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지켜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헤드폰 박스를 다시 옷장 안에 집어넣고 그 후 내 마음속에 일어나는 일들과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더 나은 것
우리의 마음이 물욕을 드러낼 때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더 나은 것'이라는 명분일 것이다. 더 나은 것을 손에 넣으면 나는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내 삶도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사실이고 확실하다면 그 물욕은 실천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처럼 믿고 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당시 무선 이어폰인 에어팟을 아주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고가의 헤드폰이라는 욕망은 그 만족을 금세 일그러뜨려 놓기 충분했다. 너는 에어팟 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가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설득이 고개를 든다.
더 훌륭하고 비싼 물건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새로운 것
'더 나은 것' 만큼 파급력 있는 명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새로운 것'이다. 새로운 것이라는 것은 중독성이 강한 매혹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설령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급이 낮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새롭다는 명분 아래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래된 수집 취미 중 하나인 우표수집을 예로 들어보자. 이 우표수집가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우표를 손에 넣었다면 과연 그 최고의 한 장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가장 좋은 우표를 손에 넣었다면 그다음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값진 우표를 갖고 싶을 것이다.
우표의 값어치를 떠나서 새로움은 계속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비싼 우표부터 가장 싼 우표를 모두 가질 때까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계속된다.
나 또한 이미 충분한 헤드폰과 이어폰이 있었음에도 새롭다는 이유로 또 하나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내게 진정한 새로움을 안겨줬을까?
나는 여기서 욕망은 오름차순뿐만 아니라 내림차순으로도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야 보다 낫고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다. 말의 뜻에 이미 긍정을 내포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성분표를 확인해 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세상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다 못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가 현혹하도록 자동화하는데 까지 성공했으니 말이다.
모든 장단점을 정리해 봤을 때 최종적으로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은 새로운 헤드폰이 아닌 이미 쓰고 있는 에어팟이었다. 즉 나에게 더 나은 것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헤드폰은 현재 새로운 주인을 만나 떠나간 상태다. 비록 재미없는 쪽을 택했지만 내 마음속에서 벌어진 레이스를 흥미롭게 관전한 것으로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새로움을 즐기는 것도 좋았겠지만 그 기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고 후에는 더 큰 갈증과 허무함이 찾아왔을는지도 모르겠다. 물질적인 새로움이라는 것은 늘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방심을 틈타 다양한 형태로 또다시 찾아온다.
욕망을 상대로 매번 승리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