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평가(1)
훌륭한 MD로의 성장이 기대됨. 내가 처음으로 받아 든 인사평가 결과지에는 팀장님의 한 줄 코멘트가 입력되어 있었다. 당시 인사평가는 총 5단계의 등급으로 매겨졌는데, 저 코멘트와 함께 중간 수준의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첫 평가 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리고 아마 저 평가는 팀장님의 진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MD로서의 내 역량은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형편없던 팀원에게 저 정도 평가를 해주셨으니, 난 마땅히 기뻐했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평가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정의된 나의 미래가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훌륭한 MD라고?
중도에 계열사가 변경되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면접 봐 들어온 회사였다. 인사팀 미팅에서 내 입으로 이야기한 희망부서가 이곳이었다. 메신저의 본인업무 소개에 당당히 방송MD라고 적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최선의 미래 = 훌륭한 MD라는 선언을 들으니 뭐랄까, 낯설기 짝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나는 2014년 7월에 입사했으니 그 해는 인사평가 대상이 아니었다. 이듬해인 2015년부터 평가대상이었고 첫 평가지를 받아 든 건 2016년 초였다. 어느새 직장생활이 약 2년이 지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부서이동을 해야겠다 고 마음먹었다. 그게 안되면 이직이라도 하리라. 내가 꿈꾸던 미래는 여기에 없으니까. 피상적인 칭찬 한 줄에 뜬금없이 내 이직 욕구가 불타올랐다. 팀장님이 원했던 반응은 이게 아니었겠지만.
직장인에게 평가결과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지난 1년간의 업무 성과를 등급 하나, 한줄평으로 받아 드는 것이니까. 특히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 입장에서는 회사에서의 첫 성적표를 받아 드는 것이기에 느낌이 더욱 남다를 것이다. 물론 성적표가 모든 걸 결정했던 학교와 회사는 다르다. 당장의 평가등급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평판을 만들고 내공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와닿지 않는 위로일 뿐이겠지.
HR부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대학생이나 취업준비생에게 물어보면 입을 모아 채용 및 교육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원자 입장에서는 기업을 만나는 유일한 창구가 인사팀의 채용담당자니까. HR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분야 중 하나가 평가(기획) 업무라고 생각한다.
업무 자체의 난이도가 높거나 이론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직원과 경영진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제도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제도가 완벽하더라도 평가를 시행하는 것은 결국 사람인데, 평가자 입장에서는 직원의 업무성과만을 고려해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 평가자가 어떤 딜레마를 겪는지 이해하기 위한 예를 들어 보자.
여기 직원 A, B, C가 있다. 먼저 직원 A는 셋 중 객관적으로 가장 우수한 정량적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이는 담당 프로젝트의 외부 시장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상황을 구체화하자면, 엔데믹으로 여행 수요가 폭증하여 담당 상품군인 여행업이 전년비 엄청난 호황을 누린 것이다. 오히려 현 상황에 안주하는 바람에 기대했던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했다.
다음으로 직원 B는 팀 내 에이스로 전문성을 바탕으로 1년간 밤낮없이 프로젝트에 매진했으나, 외부 여건 악화(ex. 원자재 가격 상승 등)로 실적이 전년비 하락했다. 비록 목표에는 미달하였지만 이 직원이 기여한 바는 크다. 이 직원이 아니었다면 더 큰 위기가 닥쳤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직원 C는 셋 중 가장 후배인 주니어 사원이다. 아직 주도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단계는 아니어서 직원 A와 B의 서포트 역할을 부여했다. 그렇기에 올해 눈에 띄는 성과가 없지만, 부여한 운영업무는 큰 문제없이 수행해 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향후 중요한 업무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올해 말 대리승진을 앞두고 있다. 후려쳐서 정리하자면 아래의 그림과 같다.
당신이 팀장이라면 셋 중 누구를 가장 우수하게 평가할 것인가? 누굴 선택하든 불만이 발생할 상황이다. 직원 A를 B보다 높게 평가하자니 B의 입장에서는 팀장이 업무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비관에 빠질 것 같고, B를 높게 평가하자니 A가 평가기준이 뭐냐고 따질 것만 같다.
이를 모두 고려한 관리자 입장에서는 공정함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위의 예처럼 직원 C가 올해 승진대상인 경우, 고평가는 결국 C에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 고평가에 대한 기회비용이 C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다른 두 명은 올해 만족스럽지 못한 평가를 받더라도 내년이 있지만, C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승진이 누락된다. 단순 저평가로 인한 사기저하보다 승진 누락이 훨씬 더 충격적인 법이다. 어쩌면 직원 C는 이직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제도와 무관하게 평가의 공정성에 대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위 상황은 예시일 뿐이며 실상은 더 복잡하다. 위의 상황처럼 훌륭한 직원들로만 팀이 구성된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팀원은 스스로 나는 좋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에 비해 성과나 업무노력이 못 미치는 사람일지라도 스스로가 중・고성과자라 생각한다. 사람은 엄청난 완벽주의자가 아닌 이상, 스스로에게 관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직원은 결국 팀장을 원망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론이 검토되는데, 주로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상대평가 자체가 문제라는 입장이다. 많은 직원들이 배분비를 강제하는 상대평가는 구시대의 유물이라 생각한다. 상대평가는 직원들 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유도하고, 협업보다는 개인 성과를 중시하게 만들어 팀워크를 저해한다. 정량실적 등으로 비교우위, 열위를 매기는 방식은 직원의 역량, 노력과 무관한 외부요인을 반영하기도 어렵다. 최상위 성과자가 되기 위한 스트레스가 늘어나다 보면 이는 장기적으로 직원들의 동기 부여를 저해한다.
대안으로 절대평가가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제안된다. 절대평가 시 타인과의 비교로 인한 심리적 부담이 감소하고,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교질을 하지 않다 보니 협업이 촉진되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절대평가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변별력이다. 특히 보상과의 연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평가란 급여 인상 및 성과급과 연계되어야 하는데, 절대평가를 시행할 경우 모든 직원이 높은 평가를 받는 평가 관대화가 발생하게 된다. 모두에게 동일한 수준의 임금인상과 성과급을 지급하여야 한다. 또한 장기적으로 핵심인재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하게 된다.
혹자는 절대평가도 명확한 기준으로만 운영하면 고성과자와 저성과자를 구분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과연 현실적으로 그러할까. 당신이 팀장이고, 절대평가의 권한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수고한 팀원 모두에게 높은 등급을 주면서 사기를 증진하는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굳이 일부 팀원의 평가를 깎으면서까지 평가의 합리성을 추구하겠는가? 더군다나 옆 팀장들도 대부분 관대하게 평가하는 상황에서, 나만 합리성을 따지면서 우리 팀원의 평가를 깎는다고? 만약 그렇다면 나는 팀원들에게 어떤 팀장으로 평가될 것 같은가?
어떤 문제든 정답과 이상향이 있는 의무교육에서도 학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사람들을 갈라서게 만든다. 하물며 정답이 없는 사회생활에서는 오죽할까.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평가에 대해서는 워낙 다양한 논의가 있기에, 다음 글에서도 평가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이어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