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1)
한 차례의 이직시도가 좌절되고 나니 예상외로 이직에 대한 생각이 많이 잦아들었다. 다행히도 이직 실패 원인이 처우 산정의 어려움이었고, 나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 원하면 언제든 여기를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버틸만해졌다.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국에서 강을 건널 다리를 지었는데, 좁고 형편없는 다리였는지 사람들이 건너다 자꾸 강으로 떨어지더랜다. 고민하던 관계자는 떨어지더라도 안전하도록 다리 아래 대형 그물을 설치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아무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떨어져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떨어지지 않는다. 불안의 해소가 헛디딤을 방지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이직 필요성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의 나는 입사 3년차였지만, 근속 기준으로는 만 2년이 채 안된 시점이었고, 아직 이직의 적기는 아니었다. 우선은 연말에 부서 이동을 시도하자, 그래도 안되면 그때 가서 이직을 시도하자.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당시의 우리 팀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팀장님이 바뀌었다. 전(前) 팀장님은 입사 후 오로지 명품만 전담하던 분으로 MD로서의 탁월한 센스와 주관을 가진 분이었다. 오래된 경력만큼 업체와 상품에 하나하나에 깊이 관여했다. 매우 다혈질인 성향으로 분석적인 면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감을 중시했고 부하직원들에게도 어떻게든 그 감을 키울 것을 강조하곤 했다.
반면 새로 오신 팀장님은 이와는 180도 다른 분이었다. 마케팅/편성/방송기획/영업 등 다양한 직무경험을 가진 분이었지만, 명품 카테고리에 대한 전문성이 전혀 없었다. 성향 또한 정반대였다. MBTI로 설명하자면, 이전 팀장님이 E(외향)와 N(직관) 성향이 매우 강하고 다혈질이었다면, 새로 오신 팀장님은 I(내향)와 S(감각) 성향이 뚜렷한 분이었다. (뒤의 두 개가 TJ인 점은 공통점이었다. 개인적으로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 포함 대부분이 TJ성향이었다)
대부분의 팀원들은 팀장님의 카테고리 경험 부족을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당시의 우리 팀은 전년도 실적이 영업부서 꼴찌였는데, 이 팀장님은 옆 1위 팀을 담당하셨던 분이다. 회사에서 이 분을 꼴찌팀에 구원투수(?)처럼 보낸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전문성 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우리 팀이 전년도에 꼴찌를 한 것 또한 전문성 부족의 문제였던 걸까?
부임 후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부터 팀장님은 매주 월요일 오전 정기 팀 회의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불필요한 회의 문화 근절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약 30분가량의 회의를 정례화한 것이다. 회의는 아이스 브레이킹 → 지난주 리뷰 → 주간 예정사항 및 본인의 인사이트/비전 공유 순으로 진행되었고 이 순서는 거의 예외가 없었다.
나는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시간이 내게 너무나 유익했던 것이다. 그전 팀장님의 경우, 당신이 가장 뛰어난 전문가였기에 굳이 말단인 내가 방향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실수 없이 움직이는 장기말이 되어 방송을 쳐내고 후속조치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당면한 방송과, 직후 시즌에 대한 걱정이 내 최대의 관심사였고 시야는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반면 새 팀장님은 회사 차원의 당면과제가 무엇인지, 우리 팀이 현재 위치한 곳이 어디쯤인지, 경영진이 우리 팀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매번 명확히 전달하셨다.
모 통계에 의하면 요즘 MZ세대들은 일의 의미를 매우 중시한다고 한다. 이게 비단 MZ세대만의 관점일까? 아무리 신입사원이라도 생각 없는 장기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대기업 신입사원의 경우 대부분은 인정욕구와 성과에 대한 욕심이 강하기 때문에 조직의 고민을 함께하며 본인이 유의미한 역할을 해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일의 배경과 조직의 위치를 공유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그 어떤 동기부여보다 큰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팀장님이 당시 가장 자주 하시던 표현 중 하나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였다. 이 또한 내게는 매우 생경한 표현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는가? 빨리빨리 방송을 잡고, 사은품을 구하고, 빨리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 없는 관행들이 보이고, 프로세스의 비효율이 거슬리기 시작하며, 추진할 대안과 경영진을 설득할 명분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팀장님은 매주 회의 시 본인 생각의 결과물들을 공유하며, ‘해 보고 안되면 다른 방향 찾지 뭐’, ‘작년에 꼴찌였기 때문에 더 떨어질 곳도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자’는 자연스러운 동기부여를 하시곤 했다.
그즈음부터 팀장님은 실무자들이 무언가를 보고하면 항상 왜? 를 질문하셨다. 사실 기존의 업무프로세스(초봄에는 신발을 팔고, 동시에 핸드백을 팔고, 여름에는 주얼리 비중을 높이고 하는 일련의 흐름)는 대부분 관성대로 진행되었다. 이 역시 전 팀장님의 영향이었으리라. 그땐 그걸 팔아야 잘 나가니까. 때문에 팀원 일부는 팀장님의 이러한 질문을 매우 불편해했다. 팀장님이 처음 와서 잘 몰라서 저런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생각은 달랐다. 그 질문은 스스로의 업무를 제로베이스에서 되돌아보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 프로세스가 완벽했다면 전년 실적이 꼴찌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시 우리 팀은 TV채널의 감도를 결정짓는 패션아이템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 非패션 카테고리인 여행구, 소품 등에는 큰 노력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이 부분을 개선하면서부터 팀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익률이나 생산능력 등은 非패션 아이템들이 월등히 나았기에, 이를 왜?라는 질문을 통해 되돌아보게 만들고 싶으셨던 것이다.
당시에도 나는 팀에서 막내였는데, 주간/월간 회의자료 등 대부분의 paper work을 혼자 떠맡고 있었다. MD에게 필요한 상품 감각이 다소 부족했던 나는, 잡무라도 모조리 떠맡아 완벽히 해내어 내 가치를 증명해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팀뿐 아니라 사업부 회의자료까지 도맡게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패션 MD 그 자체였던 기존의 팀원들에게서 이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매출을 해야지.
하지만 팀장님은 때로 늦은 밤 홀로 야근 중인 내게 전화하셔서 니가 지금 일이 우리 팀에 매우 중요한 일임을 기억해라, 고생 많다, 고맙다 라 말씀해주시고는 했다. 그 몇 마디의 격려가 눈물겨울 정도로 감사했다. 내가 뭐길래. 내 고생이 견마지로처럼 느껴지며, 조직에 더 기여하고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더 ‘곰곰이’ 고민해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