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르손, 바느질하는 여자 1887 미술감상에세이
내가 20대 초반에만 해도 북유럽풍 카페는 줄을 설 정도로 인기였다. 사실 카페 뿐 아니라 팬시점의 북유럽풍 인테리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눈요기였다. 이런 유럽 실내 이미지는 우리 집보다 세련되고,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여서 그렇게 꾸며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림 속 칼 라르손 아내의 바느질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배치된 가구와 액자, 식물들의 색감이 여인의 바느질을 더 예뻐 보이게 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가정에서 주부가 할 일이 고상하고 우아한 것은 아닐 것인데 칼 라르손의 바느질하는 여자는 편안하고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는 자의 마음상태가 평안하고 여유로울 때 가장 꾸밈이 없는 상태의 그림이 나온다. 가정 생활이 편안하면 말투와 말에서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칼 라르손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녹아있으니 보이는 이들에게도 편안함을 주어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8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것도 남 다른 자녀 사랑이 엿보이며그의 다른 작품에도 자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자주 등장한다. 평범함이 비범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평범함이 제일 어렵다. 평범한 그의 일상,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웃고 있는 것 같다. 집, 마당, 잔디밭, 나무, 테이블이 웃고 있다. 색이 웃고 있다. 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웃고 있다. 선들이 웃고 있다. 새빨간 수납장이 아주 상큼하게 웃고 있다. 이 집 식물들은 어느 집보다 싱싱하며 생동한다.
바느질 하는 여자가 고개 숙여 바늘에 시선을 쫓으며 웃고 있다. 칼 라르손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웃고 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이 모두 환하다. 식구가 많을 텐데 저 많은 옷감을 언제 바느질을 끝내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평범한 일상이라도 예쁘고 아름답기에 남겨두고 싶은 한 장면이라 이 순간을 그렸을 것 같다. 칼 라르손의 작품들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편안함. 행복함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나 어릴 적에 우리 엄마가 바느질 하셨던 장면들을 더듬었다. 엄마는 바느질을 버거워 하셨다. 큰 이불을 바느질 할 때면 이불 껍데기 속에서 나와 동생이 들어가 까르르르 거렸는데 엄마는 신경질을 내셨다. 아마도 7~8살쯤 같다. 그 땐 그게 재미있었지만 그런 중에도 나는 엄마 눈치를 보았다. 엄마의 마음 상태가 불안함의 연속이였다. 아빠와의 불화로 큰 소리가 오가고 엄마가 우는 것으로 끝맺었다. 며칠씩 분위기가 초상집 분위기 같았는데 나는 그때마다 말도 못붙였다.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도 두 분은 헤어지지 않으시고 암울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바느질이라는 것은 옷과 구멍 난 양말을 꿰매는 일, 떨어진 단추를 자기자리에 잘 매달아 놓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바늘귀에 실을 넣는 순간부터가 애정 없이 할 수가 없다. 마음 상태가 안 좋으면 바늘귀가 작은 것부터, 실 끝이 꼬부라져 자꾸만 들어가지지 않는 것까지 짜증이 나니까. 늘 고단하고 삶이 팍팍하니 아빠에게 그 탓을 돌리며 살았던 엄마는 마음이 꼬여서 구멍 난 양말을 꿰어 신어야 하는 상황을 두고도 매우 슬퍼했던 것 같다. 한 여인의 삶의 회한과 외로움을 가득 담아내어 힘없이 한 땀 한 땀을 이어간 바느질. 엄마의 어두움이 어린 나에게 온몸으로 느껴지니 아마도 난 그 정서를 반복, 누적 경험했고 내 안에 해소되지 않은 우울함이 쌓여갔다. 그 분위기에서 뛰쳐 나올 수 있는 것은 내가 경제적으로 힘이 생겼을 때였고 도망가듯이 결혼 생활을 선택했다.
막 돌이 된 아들의 자그마한 외투에서 떨어진 노랑 단추는 참 작기도 작다. 다행히 내 시선에 멀리 도망가지 않아 뱅그르르 돌다 이내 멈추면 주워서 원위치 시키기 위해 바늘통을 꺼낸다. 아이의 작은 외투, 돌고 돈 단추군 , 날 기다리는 바늘과 실. 누가 이 장면을 그린다면 이 장면은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중학교 때 십자수가 대유행을 해서 서로 십자수를 만들어 친구들 사이에 선물도 하곤 했다. 난 작은 열쇠고리 십자수 하나를 사서 시도하다가 문지방으로 확 던져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열을 맞추고 색을 맞추어가며 바늘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행위가 그렇게도 식은땀이 났다. 그냥 하나 사지? 내가 거기에 몰두한 친구에게 던진 한마디다. 난 선머슴인가? 미동도 없이 한 곳을 응시하며 반복하는 바느질이나 십자수, 지점토로 만들기, 비쥬로 팔찌 만들기, 목걸이 만들기 등은 나에게 어후, 손사래 쳐지는 행위다.
아이를 낳고 내가 손사래 치던 바느질을 하게 되다니! 내 모습이 좀 우습기도 했다. 엄마가 되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고, 하기 싫던 것도 썩 나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애정이 있으니 바늘귀에 실 들어가는 몇 초에서 몇 분사이가 그리 즐겁다. 결혼 전이라면 내 옷에 덜렁덜렁 곧 낙하하실 단추님을 대응하는 자세는? 고민도 없이 그 바느질 행위를 멈추고 다음으로 미루며 옷장행이다.
아이의 엄마로 살다보니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아이에게 맞춰지고, 생각과 목표가 아이를 중심되고 그러면서 나는 웃고 있다, 누가 나의 일상을 찍어준다면 모두가 스마일. 한 컷 한 컷 스마일일 것이다. 때론 아이의 투정과 떼로 지붕 뚫고 하이킥하고 싶을 때도 자주 오지만 자고 일어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있다.
나보다 섬세한 두 양반(남자1호, 남자2호)은 어깨가 2cm정도 터진 나의 여름 원피스를 꿰매 주겠다며 서로 나선다. 남자 1호는 군인시절 바느질 경력을 운운하며 나의 바느질 실력에 비웃음과 동시에 자동 우쭐모드다. 남자 2호가 자기도 바느질을 시켜달라고 하여 헌 천을 꺼내주었다. 고사리 손으로 실을 바늘귀에 옮긴다. 제법이다. 한 방에 잘 들어간다. 가장 기본적인 바느질 법을 알려주니 한참을 몰두 하던 2호는 8살이지만 반듯반듯하게 줄을 잘 세웠다. 나보다 낫다! 내 피가 아니고 아빠 피다. 신통하기도 하다.
난 바느질을 안하기 시작했다. 살짝 터진 옷도 남자1호가 다 해놓는다.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되지. 난 애들하고 씨름이나 하면 된다. 아이를 잘 잡고 팍 하고 쓰러뜨리는 스릴에 나도 재밌고 2호, 3호님의 까르르터지는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는 시계 바늘같다. 우리 집에 화가가 산다면 이 장면도 꽤 재미있는 작품 소재일텐데! 이 장면을 칼라르 손이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우리 집 빨간 시계와 노란 단추가 웃고 있을 것이다. .
칼 마르손의 <바느질 하는 여자> 옆에 옷감이 테이블에 한 가득이다. 아이만 8명이니 한참 그러고 있다가는 거북목이 될 거다. 예뻐 보인 다는 것은 내 맘이 행복하다는 거다. 칼 마르손이 예뻐 보여서 집안의 찰나들을 그렸다. 누가 보아도 행복을 그린 거라고 하지 않는가?
어찌 되었든 나는 바느질을 안해도 이뻐 보이는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