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달리기 하실래요?"
"네?! 저요? 저는 무릎이 안 좋아서 달리기 못 해요~"
비가 내리던 수목원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나를 보며 건넨 말이었다. 같이 달리자고.
40년을 살아오며 자의로 달리기를 한 일이 몇 회나 되려나? 일상 중 머리카락이 흩날리도록 속력을 내는 일은 깜박이는 초록 신호등 불빛을 만났을 때, 아이가 계단을 향해 질주할 때, 가스불 위 냄비에서 분수처럼 음식이 끓어 넘칠 때 말고 있었던가?(그것도 달리기 라면 나는 단거리 달리기를 생활화하는 사람일 것이다)
숨 쉬고 사는 일에도 번아웃이 온다면 아마 당시가 그런 시기였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거 같아 신청한 100일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매일 달리는 친구는 처음 나를 만난 자리에서 운동, 특히 달리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 큰아이를 서서 키운 탓에 비만 내리면 쑤셔대는 성치 않은 무릎이 떠올라 단숨에 거절을 했다.
"무릎 하고 달리기는 큰 관계가 없어요"
'거짓말'
"달릴수록 무릎 주변으로 근육이 강화되어 건강한 달리기가 가능해요"
'거짓말'
그녀가 아무리 뭐라 하든 이미 나는 믿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둘러 대기만 했다.
"달리기를 쉽게 접근할 방법으로 달리기 어플의 30분 달리기 프로그램을 이용해 보는 것도 좋아요"
"아.. 네.."
그렇게 달리기가 인생에 들어오려다 튕겨져 나갈 찰나, 국대급 수비 실력을 발휘한 그녀가 결정 골을 집어넣었다. "그럼 같이 뛰어봐요"
거절에 약한 나라는 사람의 허를 찌른 제안에 묵음으로 답을 하고 달리기를 영접하고야 말았다.
처음 3분을 달린 날은 달리기라는 걸 할 수 있는 몸이었구나에 놀라워했고 5분을 달린 날은 스스로의 변화에 놀랍기까지 했다. 그렇게 8주가 지난 어느 날부터 30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의 한계를 스스로 정해 놓고 틀을 깨보지 못 했던 내가 달리기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번에 긴 거리를 달려야 했다면 포기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서 얻은 결과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달리기라는 운동을 하며 포기하고 싶다는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해 보는 등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깊이 접근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불어 체력도 좋아지게 되며 하루를 촘촘하게 쓸 수 있는 힘도 얻게 되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요즘,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달리려 하고 있다. 길고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며 마음의 무게도 축축하고 무거워지는 한 주를 보냈다. 오랜만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잘 자고 일어난 아침, 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너무도 반가웠다.
나는 주저 없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향했다. '오늘은 달려야 하는 날이야'
나를 달리게 만든 장본인과 만나 바닷길을 뛰어본다. 하늘도 푸르고 바람도 불어주니 기분이 째진다.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 일주일 만에 달리기를 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3km를 달릴 즈음부터는 '왜 달린다 호들갑을 떨었지?' 하며 후회를 해본다. 동네 산보 하듯 아무렇지 않게 뛰고 있는 친구 옆에서 헐떡거리며 달리는 내가 무슨 달리기를 논한다는 건가 싶어졌다. 심박수 170..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거 같다.
다행히 내 심장은 튼튼했다. 5km를 뛰고 땀에 흠뻑 젖어 이온음료를 들이켜니 원효대사 해골물이 이런 맛이겠구나 싶었다. 달디 단 기분으로 오늘도 무언갈 하나 해냈다는 성취감을 함께 느낀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달리고 난 후의 나를 좋아했다는 걸 깨닫는다. 가끔 이렇게 스스로에게 도취되는 경험은 삶을 즐겁게 한다. 오늘도 달리길 잘했다 나 자신.
.. 그래서 달리기를 하니 무릎이 안 아프나요?라고 물으신다면 "아니요. 아파요. 그런데 안 달리면 더 아파요"라고 답하고 싶다. (달리나 안 달리나 아프니 그냥 달려 보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