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눈을 뜨니 거울 앞에선 남자는 잘 다려진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부스스 움직이는 어린 딸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거실로 향한다. 작은 밥상 위 그릇에서 갓퍼낸 죽이 김을 내며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녹색의 시금치가 들어간 죽이었는데 죽을 다 끓여낸 후 시금치를 썰어 섞은 것인지 색이 무척이나 선명했다. 남자는 숟가락을 들어 간장 종지에 담긴 간장을 한 숟가락 퍼 죽에 섞는다. 그리고 그릇에 죽을 반정도 먹고 출근길에 나섰다. 이불 안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던 아이는 일어나 그릇에 남겨진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저 흰 죽, 녹색 시금치가 들어간 흰 죽일 뿐인데, 그가 간을 맞춰 놓고 가서일까? 술술 넘어가는 죽을 단순에 먹어치웠다. 그 집의 가장만이 쓸 수 있는'아빠전용' 숟가락을 사용해 먹고 나니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다. 아이는 손에서 풍겨오는 남자의 스킨 냄새를 코로 킁킁 거리며 조금 더 진하게 아빠의 존재를 느껴본다.
그릇에 흰 죽 두 숟가락을 퍼 담으며 어린 시절 죽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음식을 먹지 못하는 아빠에게 흰 죽이라도 먹여볼 요량으로 작은 용기 4개에 죽을 소분 해 사 왔다. 목으로 넘기는 음식물을 괴로워하는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몸 안으로 무엇이든 넣어야만 아빠가 살거라 생각했다. 흰 죽 두 숟가락에 물을 타 묽게 만들어 그의 입에 대보았다.
“아빠, 우리 죽 딱 두 숟가락만 먹어보자, 음식을 넘겨야 힘이 나요”
나의 간절한 애원에 겨우 입을 벌려 묽은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어 본다. 그렇게 어렵게 죽 두 숟가락을 먹어준 아빠가 너무 고마워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우리 큰아이가 처음 이유식을 시작했을 때 이 정도로 기뻐했었던가? 내 앞의 칠십이 넘은 아빠가 아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병간호를 하는 삼 일간 아빠는 작은 용기에 담긴 죽을 2통 정도 먹어 주었다. 그가 죽을 먹어 줄 때마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희망이란 빛줄기를 보는 듯했다. 나의 바람을 아는지 누워만 있던 그가 앉기 시작했고 휠체어를 끌고 짧게 병원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빠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구나, 아직은 우리를 두고 떠나지 않겠구나’
가느다란 생명의 연장이 이 죽 한 숟가락에 달려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더 이상 어떠한 의료적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호스피스 병원으로 전원을 권하는 병원의 통보를 받은 나에게 아빠를 살릴 유일한 희망이라곤 죽 한숟가락 정도뿐이었다.
< 마음이 아려와 꺼내 보지 못하던 아빠와의 추억을 이제야 꺼내 본다. 넓디넓은 병원을 우리 둘이 전세 내고 돌아다녔다. 하루의 끝과 시작이 일어나는 00:00분. 삶의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일어나는 병원이란 공간에서 우린 그렇게 말없이 많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