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들과 데이트를 합니다.
우리 집 6학년 꼬마의 여름방학이 어느덧 끝나가고 있다. 수학 학원 선생님은 이번 여름방학이 중요한 시간이라며 방학 3주간 중등1학년 과정 선행을 나가야 한다 방학 전부터 야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이의 초등 마지막 여름방학을 학원에서 보내게 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중학교에 입학하면 하고 싶지 않아도 늦은 시간까지 공부를 해야 할 텐데 3주 먼저 선행을 한다고 무엇이 크게 바뀌겠는가?
"이번 여름방학은 특강 하지 말고 엄마랑 놀자"
그렇게 시작한 아이의 여름방학은 시작부터 요란스러웠다. 방학식부터 코로나에 걸려 아이와 내가 순차적으로 아프기 시작하며 2주를 병치레로 날려 버렸다. 안 그래도 마르고 왜소한 아이가 마른 나뭇가지 마냥 앙상하게 말라 버려 뭐라도 먹여 살을 찌우는 (원상 복귀시키는) 일에 방학 기간을 다 써버린 것이다.
여름 방학 동안 바다와 수영장에서 온몸이 까매질 정도로 놀겠다는 다짐이 상상으로 그치고야 만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 분명 나와 밖으로 놀러 다니지 않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전해 듣는 중학생 아들들의 생활패턴은 대략 이러했다.
일어난다->먹는다-> 방으로 문 닫고 들어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종일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계신다->지루하면 컴퓨터로 게임을 하신다->먹는다-> 잔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집에 두고 밖으로 나간다는 사춘기 아들엄마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예기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나의 외출 제안에 40% 정도 호의를 보이는 아이에게 개학 전 데이트를 요청해 본다.
"엄마 쉬는 날인데 개학 전에 데이트하러 나갈까?"
"어디 갈 건데? 사람 많은 데는 가기 싫어요"
사람 많은 곳은 싫고, 더운데도 싫고, 산도 싫고, 바다도 싫은 청소년과의 데이트 장소를 선별하느라 머리가 바빠지는 어미이다. 고객님이 흡족해하실 만한 장소를 최대한 선별해 차에 태우는 데까지 성공. 물론 장소를 상세히 말해선 안 된다. 말하자마자 '싫어요'라는 단어로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최대한 상냥함과 약간의 오버스러운 말투로 " 너랑 단둘이 놀러 나가니깐 기분이 너무 신나는데?!" 라며 추임 세도 넣어본다.
흐뭇해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한다.
' 내가 살면서 이렇게 비위를 맞추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영광인 줄 알아 이것아!'
아이의 요청대로 익숙하고 한적한 동네 근처 도립미술관에 미술 전시를 보러 향했다. 마침 새로 시작한 전시가 시대별로 제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그려진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워져 더욱 볼거리가 풍성했다.
오디오 작품 해설을 들으며 보자는 나의 제안에 아이는 그냥 듣지 않고 눈으로 보고 자신만의 해석을 하고 싶다 했다. 그래 그러려무나, 자유롭게 네가 상상하는 그 무엇으로 예술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아이와 함께 그림을 보며 작가의 이름과 작품이 그려진 시기를 유심히 보았다. 나 역시 미술을 잘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선에서 가볍게 아이와 대화를 주고받아 본다.
"엄마, 이 그림은 뭔가 강하게 분노하고 투쟁하는 거 같아요."
"그러네? 1988년도에 그려진 그림이니 아무래도 군사독재 시절에 그려진 그림이라 시대적 배경이 그렇겠지?"
"엄마, 이 작가님은 아직 살아있을까요?"
"음.. 작가님이 1939년 생이라 적혀있으니, 포항 할아버지와 연배가 같으시네? 아직 살아 계시고, 작품활동도 하고 계신 거 같아"
엄마 시대엔 이런 게 있었어, 엄마는 이런 그림 색채가 좋아, 너는 어떤 그림이 끌리니?
아이와 이런저런 소소한 대화들을 주고받는 이 시간이 너무도 값지다. 어느덧 자신의 화풍으로 세상을 그려나가는 아이의 세계가 신비롭고 아름답다. 여러 가지 색을 다채롭게 사용해 본인의 삶을 칠해 나갈 아이의 청년 시절이 왠지 빨리 보고 싶어 지기까지 하다. ( 내가 늙는 건 안 괜찮지만..)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 가을의 향이 실려 뺨을 스친다. 열세 살 소년의 여름도 이렇게 지나간다. 아주 오랜 시간 뒤 우리가 함께 보낸 오늘이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길 바래본다. 나의 작은 소망과 함께..
'동동아,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은 이렇게 엄마와 시간을 보내주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