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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현 May 28. 2024

작은 보호막

 어렸을 때의 가까운 친구들, 주변인들은 나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거나 같은 동네에 사는 등 내 삶과의 공통점이 짙은 인연이 많았다. 20대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들과의 인연 중 일부는 이어지고 일부는 흐려졌다. 자연히 나보다 여건이 월등히 좋은 사람들도, 조금 어렵지만 미래를 보고 달리는 사람들도 생겼다. 나역시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삶의 커다란 스펙트럼 안에서 한 지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래 전 취업이 간절했던 어느 시기에는 나보다 일찍 취직한 친구 누구를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했고, 반대로 내가 안정된 이후 아직 취직 준비중인 지인을 만나고자 했을 때 그가 만남을 피한 적도 있었다. 내면의 뾰족한 상처를 가릴 수 있는 동그란 보호막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현재 모습에 대한 불만 등이 마음 저 깊숙이 빨간 세모로 자리잡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며 삶에 안정과 여유가 조금씩 생기면 그를 감싸는 동그란 보호막을 만드는 것 같다. 


 살면서 한번씩 불안함을 건드리는 요인이 생기더라도 사람들은 그 보호막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함께 보호한다. 내가 애써 갖길 원했으나 끝내 갖지 못한 무언가를 나와 가까운 누군가가 갖게 되었을 때 모른체하거나 축하하는 척 질투감을 얼굴에 내보이지 않고 온전히 그 사람을 축하해줄 수 있는 힘, 그건 저 보호막의 힘이다. 마찬가지로 가까운 누군가가 삶에서 갑자기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겉으로 위로하는 척 자기 위안을 삼지 않고 온전한 위로를 전하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을 기꺼이 도울 수 있는 내면의 힘 역시 그 보호막의 힘이다. 얼마나 크고 단단한 보호막을 만들 수 있는지는 각자의 자존감, 행복감, 현재 삶의 만족도 등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호막의 크기와 단단한 정도가 일정시간 개인의 삶에서 굳어지면 사람들은 그것을 ‘그릇의 크기’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때로 사람들은 매우 똑똑해서 앞에서만 살짝 웃으며 축하를 전하나 속으로 질투감을 느끼는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고 속깊이 서운함을 느낀다. 반대로 앞에서는 유감의 표현을 전하나 속으로 위안을 삼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본인이 그 반대 입장에 서서 자신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을 하지 않아 그렇지 모두 차이를 안다.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지금을 살아가는 내 자존감이, 만족감이 떨어지는 시기일수록 남에게 말못할 그 이중성은 높아지고 삶에 여유를 찾을수록 그것은 낮아진다. 내 보호막이 커지고 단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 삶에 여유를 찾아 내 자존감, 행복감을 어느 정도 지켜내야 그 보호막으로 내 뾰족함을 가리고 가까운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를 다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부족한 나를 다시한번 돌아보고 아낄 이유는 이로써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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