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뮬라크르 Aug 20. 2015

무엇도 보이지 않았던

당신, 나를 기억하나요?

첫 번째 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단 하나, 그 사람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은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그 시간에 무엇을 느꼈을까. 과연, 나와 같은 감정이었을까.


  대학 시절, 같은 과의 선배였던 사람이고, 그에겐 역시 같은 과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좋아하고 있었다. 좋아하게 된 계기 같은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좋아하고 있었고,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만큼 너무 쉽게 그 감정을 인정했다. 여자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를 봐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 좋아할 뿐이라고, 이러다가 또 자연스럽게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는 여전히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제일 좋다고 했던 그 말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낮이든, 저녁이든, 새벽이든. 그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 새벽까지 거리를 쏘다녔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눈길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욕하는 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당시 나에게 그 사람의 애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여자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너무 착한 그 언니. 그 사람이 언니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내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그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그 언니는 말했다. 그 사람은 순간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려는 사람이라고, 지금은 널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그 끝은 네가 아닐 거라고. 나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조심스레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말보다 그 사람이 내게 보여준 마음을 더 믿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 사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언니와 헤어져 달라고, 내가 제일 좋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 때마다 알았다고 대답을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연인이었다. 나는 행복한 만큼 슬퍼져 갔다. 그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나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지쳐 슬퍼할 때, 그는 군대에 가게 됐다. 나에게 말했다. 여자 친구와도 정리하고, 너도 정리하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기다릴 거라고 울며 고집을 피웠다. 제발, 기다릴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끝을 내지 말라고. 우는 어린애를 달래는 마음이었을까, 그는 결국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군대에 갔다. 언니와는 정리하겠다고 이야기하고서. 그는, 끝까지 거짓말을 했다.


  군대에 가는 마지막 길을 여자 친구와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나는 얼마 동안 그를 기다렸다. 수신자 부담으로 오는 전화를 기다리고,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며,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그 기다림이 조각조각 부서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이상하게도,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울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날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허탈감과 함께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는 것 외에는 우리의 끝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닫았던 그 시간, 사랑했던 시간만이 나의 어디엔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어떨까.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 조금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 하나의 네가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