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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김 May 31. 2024

머리보다 가슴

나의 어머니

  잠결에 발바닥이 간질간질, 찬 기운이 느껴져 눈을 떴다. 엄마는 지푸라기 한 가닥으로 내 발의 길이를 재고 있었다. 엄마 곁에는 방금 딴 싱싱하고 동글동글한 애호박들이 광주리에 가득했다. 아침 이슬 깨기 전 텃밭에 나가 채마 수확을 한 엄마에게서 풋풋한 풀 내가 났다. 오후 장에서 돌아온 엄마의 광주리엔 호박 대신, 내가 신고 싶었던 예쁘고 앙증맞은 고무신이 담겨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호남선과 전라선이 만나는 익산(이리) 역을 지날 때면 엄마의 “Big Turning”떠오른다. 

‘여수 사나이’와의 사랑을 못 잊고,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야반도주한 나의 언니가 있다. 순정의 힘으로 모험에 나선 그녀는 낯설고 험한 객지에서 모진 풍파를 겪었다. 돈벌이에는 관심 없고 바깥으로만 나도는 형부 때문에, 힘겹게 집안 살림을 꾸려야 했다. 언니는 결국 엄마를 여수로 모셔갔다. 엄마와 힘을 합쳐 장사를 시작했다. 차차 수입은 쏠쏠해졌으나 형부의 외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형부는 외박을 밥 먹듯 했고, 언니에게 용돈을 타야 했다. 언니의 수입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나니, 이젠 마음의 여유가 생긴 모녀는 엄마의 귀가를 결정했다. 엄마를 여수역까지 배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언니는 엄마가 없는 집에서 형부와 대판 싸울 요량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삐~걱’ 대문 열리는 소리에 밖을 내다보았다. 아뿔싸! 엄마가 들어서는 게 아닌가! 분명히 서울행 기차에 오른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자식이 우선인 엄마는 강원도로 돌아가면 다시 여수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여수에 더 머물러야 돈을 좀 더 만져 볼 수 있었다. 여수에서 출발하여 이리까지 가는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엄마는 과감하게 결단하고 이리역에서 내려 다시 여수로 되돌아온 것이다. “얘야! 마음 떠난 남편, 애써 기다리지 마라, 때가 되면 돌아온단다. 내가 뒷바라지 더 잘할 테니, 우리 힘을 합쳐 막내를 선생님으로 만들어 보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나는 방학하는 날이면 서울로 올라와 전라선 야간열차를 탔다. 밤새 달리는 기차는 순천을 지나 여천에 다다르면 멀리 여천공단의 환한 불빛이 푸른빛 어둠을 밝히고, 비릿한 바닷 내는 내 코끝에 다가와 단잠을 깨웠다.

  엄마가 만든 동치미, 고추부각, 김부각 등은 언니네 가게에서 인기가 있었다. 엇비슷한 업종과의 차별화를 꾀한 엄마의 전략이 먹혔는지, 언니는 손님에게 받은 돈을 미쳐 셀 시간이 없어 자루에 담아 올 정도였었다. 언니에게 받는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등록금을 만들어 놓고 엄마는 뿌듯한 마음으로 방학을 맞아 내려오는 나를 기다렸었다. 엄마의 과감한 결단과 눈물겨운 희생으로 나는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새벽녘 자는 나의 이마에 엄마 손을 살포시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늙고 힘이 없어 어린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막내가 자기 힘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그 기도는 나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밤늦게 공부하는 딸에게 “피곤할 텐데 일찍 자거라” 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나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친 적이 없다. 그런데 난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의 말 없는 가르침이 통했던 것일까?     

  신규교사 발령받은 해 겨울방학 때, 엄마는 나에게 미션을 주셨다. “선생님이 된 딸을 앞세우고 친정 나들이를 하고 싶다” 즐겁고 기쁜 마음에 들떠 처음 가본 외갓집 나들이…. 그것이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4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마친 난 진정한 가르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머리보다 가슴을 채우는 게 먼저라고…. 나의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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