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
철학, 한강을 만나다 "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
철학자 박구용 교수.
구조의 차이와 주체의 타자성, 객관 미학, 미메시스.
박구용 교수는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법학이나 정치학을 전공하고 법철학과 정치철학을 논하는 일반적인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철학’을 전공하고 법철학과 정치철학으로 연구를 확장시킨 그의 명쾌한 논리는 공허하지 않고 늘 유쾌하게 귀에 쏙 들어온다. 뿌리가 달라서일까. 철학을 공부하고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법철학, 정치철학의 본산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늘 본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너튜브에서 박구용 교수의 강의를 흥미롭게 듣고 해설을 덧붙여 요약해 본다.
< 감각적 서사와 철학적 깊이가 있는 한강 문학 >
한강 작가는 현대 문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독특한 감각적, 정치적 서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이 언급한 주이상스(Jouissance) 개념은 한강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이상스는 우리의 육체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충동 만족을 위해 반복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순간순간 우리는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느새 또 이렇게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여기서 쟁점은 욕구와 충동의 구분이다.
주이상스(Jouissance)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정신분석학 이론 내에서 가장 독창적이고도 매력적인 개념이다.
주이상스는 프랑스어로 즐긴다는 의미로, 영어의 joy, enjoyment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명사인데 라캉에게 주이상스는 정해져 있는 쾌락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 찾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즉, 주이상스는 일반적인 쾌락이 아니라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고 언어상징도 넘어서는 전복에의 충동이다. 향유, 향락, 희열의 의미를 포함하는 주이상스는 강렬한 쾌락이고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그런데 무의식에 잠재한 주이상스는 법과 제도를 파괴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금기를 깨고 싶어 한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의 윤리(The Ethics of Psychoanalysis, 1959 – 1960)>에서 쾌락원리는 쾌락을 제한하기 때문에 인간 내면에는 그것을 깨트리려는 충동 즉 주이상스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쾌락원리를 넘어서는 순간 주체가 감당을 못하고 파괴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충동적이고 성적 쾌락원리인 주이상스는 죽음의 타나토스(tanatos)로 변화한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충동적 만족을 추구하며 반복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주이상스는, 한강의 작품 속 인물들이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반복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 충동은 한강의 문학 속에서 욕구와 충동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드러나며, 독자들에게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한강의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미메시스(Mimesis) 개념을 새롭게 구현한다.
미메시스는 서양 철학의 개념으로 직역하면 모방이라는 의미이며, 이는 플라톤이 제창한 자연계의 개체는 이데아의 모조라는 개념에서 유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개념을 계승했는데 둘의 생각은 미묘하게 달랐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문화를 이야기할 때 사용했던 용어인 미메시스란 단어 자체는 모방자, 연기자를 의미하는 mimos에서 따왔는데, 사용했던 의미는 포괄적이었다.
이는 ‘모방’이라는 말 그대로 현실을 표절하거나 정밀묘사한다는 의미에서의 모방이라는 개념보다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통해 특정한 추상적 개념을 보여주는 데 가까웠다. 그런 이유로 '재현'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여기서 재현한다는 것은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되, 미학적인 틀에 맞춰서 재현한다는 의미이다.
플라톤은 미메시스를 이데아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이를테면 인간을 예술을 통해 표현할 경우 인간의 모습을 딴 조각상을 만들거나 인간의 행동을 묘사한 이야기를 짓는 등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을 "모방"하여 만들듯이 현실 또한 이데아의 모습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저평가했는데, 이는 이데아의 모방품인 현실도 이데아를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인데 그 현실의 모방품인 예술은 이데아의 모방품의 모방품이니 가치를 둘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eidos)만을 떼어내어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플라톤과 달리 미메시스야 말로 이데아를 보여주는 참된 예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한강의 작품을 읽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유기체적으로 타자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의식적, 이성적으로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내가 소설 속 인물에 동화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타자들이 주체가 되어 전달이 되는 이런 경험을 박교수는 객관주의 미학, 내용미학이라 지칭한다.
(이와 달리 작가 개인에 대한 분석, 정신분석학적 탐색, 혹은 소설 속 주인공/인물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려는 것을 형식주의 미학, 주관미학이라 한다)
독자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단순히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고통과 감각을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소년이 온다>와 같은 한강 작가의 소설을 끝까지 읽기 너무 힘들다.. 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이다.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문학적 동화의 경험으로, 독자가 한강의 소설 속 타자성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노벨위원회에서 발표했던 한강 작가의 문학상 선정 이유에 등장했던 표현으로 이제는 흔히들 말하는 ‘시적 산문’ 이란 말의 의미는 단순히 문장이 시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운율을 잘 맞췄다거나 리드미컬한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한강 작가의 글은 언어로 장난치거나 꾸미는 게 없이 그야말로 절제된 언어를 사용한다.
자기 신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 고통받은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모든 감각이 순수해진 상태’, 그 상태에서 대면한 타자의 모습을 느끼고 있는 신체의 리듬 그대로, 자신의 감각이 바로 그 타자가 되어 직접적으로 느끼는 그대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강은 일종의 ‘문학적 영매’로써, 자신이 만난 타자들을 가장 적합하게 묘사하기 위한 언어를 찾을 뿐이다. 감각적이지만 그 어떤 장식도 허용하지 않는 그 언어는 절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는 어린 시절 폭력의 트라우마로 인해 육식을 거부하게 된 여성이 극단적인 채식을 하며 나무가 되기를 꿈꾸는 과정을 담고 있다.
또 다른 작품인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역사적 사건의 중요성을 문학적으로 재조명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폭력을 거부하려는 모습과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심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상처와 교훈을 가슴 아프게 전달한다.
한강의 작품은 시적인 언어로 벼려진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 연약한 인간의 마음에 깃든 고통을 차갑게 관조하며 승화시키고 있다. 그녀는 최대한 중성적인 시선으로 인류의 비극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그 속의 고통과 혐오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들을 조명해 왔다.
박구용 교수는 이러한 한강 문학을 “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이라고 평가한다. 통치술이란 목적에 의해 행사되는 폭력의 시스템적 작동 방식을 뜻한다.
한강 작가는 이러한 폭력에 무감각하거나 무사유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의 고통에 감각적으로 반응하며, 이를 통해 시대적 폭력과 전체주의에 저항한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드러낸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단순히 생각이 없음, 감각이 없음이
아니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무기력증이 아니라 적극적인 무시 행위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기계적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만 하는 ‘무사유’가 얼마나 거대한 ’ 악(惡)’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설파했다.
상호존중하고 인정하는 게 불가능한 이런 무사유, 무감각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람, 감각하는 사람’을 적으로 적시하고 파괴하려고 한다. 바로 폭력의 시대, 전체주의 시대로 가는 것이며, 소위 블랙리스트는 그런 목적으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무감각’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할 타자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무사유’보다 ‘무감각’에서 기인한 폭력이 더 잔인성을 띠게 된다.
200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나, 임무에 충실했던 젊은 해병대원의 억울한 죽음에 아무런 고통도, 책임감도, 죄스런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정부이기에 위령소에 희생자의 명패도 놓지 못하게 하고 조문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다. 책임을 질 사람을 자기 사람이라고 무조건 보호하고, 듣기 싫은 말에는 입틀막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게 잔인해지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타인은 지옥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서 연약함 속에 존재를 이어가다가 우연하게 죽는다.’
‘나는 존재한다. 그게 전부이고, 그래서 구역질이 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Charles)는 그의 소설 <구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가장이나 지워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이다.”
우리의 마지노선이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목소리 같달까. 한강 작가는 우리가 지금까지 합의했다고 생각하는 마지노선의 가장 밑바닥까지 다가간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상태, '무'의 상태까지 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삶이 죽음보다 값어치가 있는 거야?’라는 질문에까지 간다. 이제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규범과 가치를 그 어느 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감각적으로 가장 여린 것에서 바로 가능성을 보고 희망을 가진다.
한강 문학은 이런 무사유와 무감각을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닌, 적극적인 무시에 가까운 것으로 묘사한다. 특히 무감각에서 비롯된 폭력은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며, 더욱 잔혹해진다. 한강은 이러한 무감각의 시대 속에서 삶의 마지노선을 탐구하며, 그 밑바닥에서 희망을 찾는다.
한강 작가의 그 여린 감수성은 계속해서 새로운 타자성을 만나고 또 만나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점점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이며, 그의 작품세계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진화하고 있다.
한강의 문학은 기존의 그 어떤 문학 해석의 이론으로도 완전히 포섭되고 해석될 수 없는 ‘순수한 감각’을 담고 있다. 그의 문장은 꾸밈없이 절제된 언어로, 타자의 고통과 감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리듬이나 언어적 장식이 아니라, 타자를 가장 적합하게 묘사하기 위한 언어적 탐구로서 나타난 것이다.
니체는 예술은 종교가 몰락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박구용 교수는 이를 한 단계 확장하여, 한강 문학이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와 도덕, 심지어 감각까지 무너진 무감각 무사유의 시대 -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한 시대, 타인의 타자성에 무관심한 시대 속에서 삶과 세계는 예술로써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깊이 있게 보여준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설명한다.
한강은 자신의 문학을 통해 타자의 고통과 감각을 대면하며, 이를 가장 적합한 언어로 전달한다.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고통, 그리고 억압의 현실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도 하는 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단순한 감동을 넘어선 철학적 질문과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시대에 감각적으로 깊이 반응하는 한강의 문학은 독창적인 예술로서, 현대 사회의 무사유와 무감각에 맞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