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클래식의 거장 차이코프스키 자살하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으로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185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1859년에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했고, 그것이 186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으로 승격되어 1기 학생이 됐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루빈슈타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러시아 국민악파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러데 차이코프스키가 국민악파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자 루빈슈타인과 결별한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서유럽 쪽으로 기울면서,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았던 국민악파와 결별하게 된다.
1874년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하였다. 이후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다가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 이상 차이코프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하게되고 차이코프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원치않는 결혼과 3개월만의 결별로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78년에 귀국한 차이코프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해가 된 1893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1979년에 소련 문화부에서 부검했더니, 그의 몸에서 비소가 나왔다고 발표하면서 음독으로 인한 자살로 판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