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등의 격렬한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음악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시민 혁명을 통해 성장한 부르주아(시민 계층)가 정치·경제계를 넘어 사교계에 진출하면서 음악의 향유 방식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독점하던 상류 문화가 일반 대중이 즐기는 대중문화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공공장소에 카페, 클럽, 연주회장 등이 생겨나면서 음악가들은 궁정의 후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개인 저택, 공원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저변을 넓히게 된다.
이러한 격변기에 문학계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라는 거장이 등장했다. 그는 당시 변방국이었던 영국에서 사용되던 영어의 품격을 한 단계 이상 상승시켰으며, 이는 18세기 영국 문화가 유럽 본토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문화적 자부심의 토대가 되었다.
1705년 '여왕의 극장'인 헤이마켓 극장을 필두로 링컨스 인 필즈, 코벤트 가든 등의 오페라 극장이 설립되었다. 또한 각종 음악 아카데미, 협회가 창설되고 자선 음악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영국은 음악 활동을 위한 재정적, 물리적 인프라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환경은 윌리엄 보이스(William Boyce), 토마스 안(Thomas Arne), 존 스탠리(John Stanley) 등 걸출한 영국 음악가들을 배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 영국 음악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은 독일 출신으로 귀화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이다. 당시 음악의 대중화로 활발한 활동과 금전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던 영국은 유럽 전역의 음악가들을 끌어모으고 있었고, 헨델 역시 1712년 런던에 정착한 후 급기야 귀화를 결심하게 된다.
헨델은 1711년 카스트라토 니콜리니 주연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 HWV 7)》를 대성공시키며 영국에서 입지를 굳힌다. 1719년에는 국왕 조지 1세의 후원 아래 귀족들이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발족했는데,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 후원 기관이었다. 이 아카데미는 일류 작곡가, 가수, 상설 오케스트라 등을 지원하며 이탈리아 본토와 견줄 만한 고퀄리티의 오페라를 상연했다.
이 시기 헨델의 《줄리오 체자레(Giulio Cesare, HWV 17)》나 《타메를라노(Tamerlano, HWV 18)》를 비롯하여, 아리오스티, 보논치니 등 라이벌 작곡가들의 작품이 활발히 상연되면서 영국은 유럽 음악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여들면서 과도한 경쟁과 디스로 인해 내분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최고들의 최악의 상황' 속에서, 존 게이(John Gay)의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1728)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거지 오페라》는 당대 영국의 정치, 수상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그리고 엘리트주의적인 오페라 세리아를 풍자하는 발라드 오페라(Ballad Opera)였다. 서민들의 공감과 인기를 이끌어내며 62일 연속 상연되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청중의 관심을 오페라 세리아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는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737년에 문을 닫고 만다.
오페라가 몰락하자 헨델은 오페라와 유사한 극적 성격과 성악 구조를 가지면서도 무대 장치나 의상 없이 연주되는 오라토리오(Oratorio)로 눈을 돌려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장르는 종교적 주제와 영어 가사를 사용하여 영국 대중의 정서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와 더불어 헨델은 웅장한 대관식 앤섬(Coronation Anthem)이나 궁정을 위한 대규모 앤섬(Anthem)들도 작곡해 나갔다.
헨델의 기악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상음악(Water Music)》과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다. 특히 후자는 엑스-라-샤펠 조약 기념 불꽃놀이를 위해 트럼펫 9, 호른 9, 팀파니 3, 오보에 24 등 대규모 편성을 자랑했다.
헨델의 협주곡집은 여전히 코렐리(Corelli)의 합주협주곡(Concerto Grosso) 양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프랑스 서곡, 춤곡, 로마와 베네치아의 협주곡 양식 모두를 포괄하는 국제적인 양식의 융합을 보여주었다.
헨델의 후배 작곡가들인 보이스, 애비슨, 스탠리 등도 트리오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등을 작곡하며 헨델의 기악곡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 높은 작품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