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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세계사] 부여: 동북아 고대사의 첫 장을 연 국가

by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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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경, 송화강 유역의 광활한 평원에 한 나라가 세워졌다. 그 이름은 부여(夫餘). 고구려의 직접적 모태이자 한반도 고대 국가 형성의 중요한 고리였던 이 나라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부여의 역사는 신화와 사료, 그리고 최근의 고고학 발굴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 각각의 증거들은 때로 일치하고 때로 어긋나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신화와 역사 사이: 복잡한 건국 전승 동명왕 전설의 수수께끼


부여의 건국 신화는 중국 후한의 사상가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 처음 등장한다. 탁리국(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이 엄호수를 건너 부여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인용된 『위략』도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는 고구려 건국 신화와 매우 유사하다. 고구려 시조 주몽도 '동명'이라 불렸고, 이야기 구조가 거의 복붙수준이다. 이것이 논쟁의 핵심이다. 부여의 독자적 건국 신화가 존재했는지, 아니면 고구려가 부여의 신화를 차용한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나뉘는 까닭이다.


해모수와 북부여의 문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해모수라는 인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다는 것. 해부루가 동부여로 이동하고, 해모수의 후손이 다시 그 자리에 북부여를 세웠다. 하지만 『광개토왕릉비』는 북부여와 부여를 서로 다른 나라로 구별하고 있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인 추모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수 홀본에 도읍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더 큰 문제는 해모수라는 인물 자체. 『광개토왕릉비』에는 주몽이 "천제지자(天帝之子)"이자 "하백의 외손"이라고만 할 뿐, 해모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대 고구려인들이 직접 새긴 금석문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 과연 실존했을까?


학계의 현재 해석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파오쯔옌식(泡子沿式) 문화를 부여 문화로 간주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부여는 기원전 2세기경 송화강 유역에서 예맥 계통의 부족들이 연맹체를 형성하며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건국 신화는 부여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후손"으로 여겼고, 이러한 천손 의식이 왕권의 정통성이 되었다. 신화와 역사 사료의 불일치는 고대 국가 형성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역사 속의 부여: 실재했던 강국 지리적 위치와 영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부여를 이렇게 기록했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 현토(玄菟)의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挹婁),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있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현재의 지린시(吉林市)와 그 주변, 송화강 유역의 비옥한 평원이 부여의 중심지였습니다. 영토는 최대 2,000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부여는 단순한 부족 연맹이 아니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췄고, 사출도(四出道) 관등 제도를 운영했다.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라는 네 개의 가(加)가 각각 사방을 담당했으며, 각 가는 수천 호에서 만여 호를 다스렸다.


역사적 사건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 격변 속에서 부여는 독자적 세력으로 성장한다. 120년, 부여왕의 태자 위구태가 후한에 사신으로 가서 인수(印綬)와 금채를 받았다. 이는 부여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67년, 부여의 부태왕이 2만 명의 병사로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한다. 물론, 이 전쟁에서 부여는 패배했지만, 이는 부여가 상당한 군사력을 보유했음을 보여준다.


3세기 중후반,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선비가 강성해지면서 부여는 큰 위기를 맞는다. 285년과 346년, 모용선비의 침공으로 부여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고, 왕이 자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494년, 고구려 문자명왕의 공격으로 부여는 최종적으로 멸망했으며, 잔왕이 마지막 왕이었다.


부여 사회의 특징


송화강 유역의 드넓은 평원은 농사짓기에 완벽했다. 부여는 오곡을 재배했고, 인삼, 담비 가죽, 과하마를 특산물로 생산했다. 과하마는 체구가 작지만 힘이 센 명마로, 중국에서 "부여의 명마"라 불리며 탐낼 정도였다.


매년 12월, 부여에서는 영고(迎鼓)라는 대규모 제의가 열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낮으로 술을 마시는 이 축제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부족 통합을 이루는 정치적 행사였습니다.


부여에는 "1책 12법"이라는 엄격한 법이 있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갚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배상한다. 간음한 자와 질투하는 여자는 모두 죽인다."


이 가혹해 보이는 법은 역설적으로 질서 정연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순장 제도의 존재도 강력한 왕권과 계급 사회를 증명해준다.


부여는 남쪽의 거대 제국 한나라와 정면충돌하지 않고 조공 관계를 맺었다. 부여는 말과 모피를 바쳤고, 한나라는 부여를 "속국"으로 인정하며 실질적 독립을 보장했다. 이 덕분에 북쪽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을 때 한나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부여의 유산: 고구려와의 관계 고구려 건국과 부여


기원전 37년, 부여의 왕자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를 세웠고, 고구려는 스스로를 "부여의 후예"라 칭했다. 하지만 현대 고고학은 더 복잡한 그림을 보여준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소수 부여계 지배층과 다수 고조선 유민들이 연합하면서 성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부여인의 묘제는 석관묘와 토광묘였는데, 고구려인의 것은 적석총이어서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주몽 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일부 반영하되, 4세기 후반 고구려가 공식 건국 신화를 정립할 때 부여의 동명 설화를 대폭 차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계루부라는 부여계 집단이 압록강 중류 지역의 고조선 유민들과 결합하여 고구려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고고학 연구가 진전될수록 백제와 고구려의 연결성은 입증되지만, 백제와 부여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문의 기원만 부여라는 결론만 나올 뿐.


그럼에도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명시되어 있다. 백제 왕실은 후기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기도 했다. 이는 정치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강력한 국가였지만,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북쪽의 유목민족(선비, 읍루), 남쪽의 고구려, 서쪽의 중국 세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받았다. 특히 3세기 중후반 모용선비의 침공은 결정타였고, 결국 494년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부여를 충실히 연구하는 일은 한국 고대사의 전체상을 복원하고, 그것을 우리의 역사로서 분명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부여는 단순히 "고구려의 전신"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적 역사를 가진 강대국이었고, 동북아시아 고대사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부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고구려의 성립도, 백제의 정체성도, 한반도 고대 국가 형성의 전체 그림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맺음말


송화강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시작된 부여는 약 700년간 존속다. 직접적으로는 494년 멸망했지만, 고구려를 통해,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통해 그 유산은 이어졌다.


부여는 사라졌지만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것들—천손 의식, 중앙집권 체제, 현명한 외교, 질서 정연한 사회—은 이후 한반도 국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거울이다. 부여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역사의 첫 장을 제대로 펼쳐 읽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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