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던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는 일.
- 네이버 국어사전
즉, 개인이 합리성이나 윤리의 검토 없이 사회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model citizen>(2020)은 개인을 어떻게 세뇌하고,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로봇과 미디어는 사회구성원이 되라고 시민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시민들에게 행복하고 완벽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과 방법을 이야기해 주고 'model citizen'의 긍정적인 면만을 끊임없이 얘기한다. 시민들은 행복하고, 로봇과 미디어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사회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을 사랑한다. 안정적인 순환에 어울리는 차이콥스키 꽃의 왈츠의 3/4박까지 완벽하다. 이 환상적인 균형에 불쾌함을 느끼는 건 애니메이션 밖에 있는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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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긍정과 행복함을 다룬 <MODEl CITIZEN>을 보고 불쾌함을 느끼는가?
AutoDale은 분명히 현대 사회의 이상적인 가족을 말하고 있다.
Model citizen is a providing father,
Model citizen is a caring mother.
All in service of a scrapy young boy and girl.
A model child, raised by a model family to become a model citizen of their own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고는 생길 수 없을 것 같은 완벽한 가족에 다음 문구가 이어진다.
And AutoDale is hardly automatic.
You and your families are the gears that keep our engines turning and turning.
내가 생각하던 행복이 사회의 지속 가능함을 위한 부품이라니 기분이 찝찝하다. 이후에도 애니메이션에서는 교묘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 사회는 성숙해진 구성원에게 웃는 가면을 부여한다. 행복한 표정 위로 가면의 미소가 중첩되었음에도 시각적으로 이질감과 기괴함이 느껴진다. 로봇에게 춤을 거절당하고서 슬퍼하는 '엄마'. 로봇과 춤을 추며 행복해하는 '엄마'. 서운해하는 엄마와 춤 한번 춰달라는 '아빠'. 로봇에게 감사하다는 '아빠'
a true model citizen know that their duties are finished and thier course has run.
사회가 요구한 제 쓸모를 다한 노인의 가면에 쓰여있는 ugly 글씨. 늙은 부모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고 범주 밖의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불쾌함이 완성된다. 가면 아래 행복이 부정된 다음에는 화면 밖의 내 행복은 진짜일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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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불쾌함을 없애야 하는가? 이 감정을 만든 애니메이션을 세상에서 삭제해야 하는가?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하는가? 어떠한 기준에 맞추어 삭제하고 수정하더라도 사회는 완벽해질 수 없다. 사회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추상어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의 완전함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은 비슷할지 언정 똑같지 않다. 삶마다 무언가를 가지지 못해 갖는 불행도, 불행 너머로 바라보는 행복도 다르다. 타인과 사회가 가진 행복의 틀이 나와 부딪힐 때, 개인은 타협점을 찾고 합리적으로 살아간다.
사회에는 개인이 합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장치가 있다. 개인은 행복 추구권에 따라 각자의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나를 불쾌하게 만든 타인에게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에게는 자신에게 합리적인 사회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투표권도 있다.
행복하고 합리적일 수 있는 권리를 떠나서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아갈 스스로에 대한 의무가 있다. 삶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포기해 버리는 행위는 협상에 불만족하며 테이블을 뒤집어엎는 것과 같다. 남은 인생에는 수많은 협상이 남아있다. 이미 손을 떠난 결과를 붙잡고 자책과 후회에 안주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회가 불합리하다고 느끼고 좌절한다. 한국 청년 히키코모리 24만 2천 명(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은 불합리함을 극복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수많은 젊은이의 좌절이 현실을 뒤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나에게 불합리한 사회가 모두에게 불합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로봇, 미디어, 사회 그 누구도 내가 원하는 행복을 나만큼 알지 못한다. model citzen의 시민들처럼 사회가 제시한 행복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은 내 행복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것이고 불합리함에 무반응으로 대처하는 것은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행위나 계획 없이 투덜거리는 것은 현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고통을 포기하고 사회가 중세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성숙하게 해소하고, 불쾌를 느낀 부분을 파악해야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다른 모습을 떠올리고 요구할 수 있다. 다시는 내 행복을 포기하지 않겠다. 행복이 있다면 불행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불행 덕에 가끔 맛보게 되는 행복이 애틋하다. 부정적인 감정을 즐기게 되었다는 친구의 말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불안, 슬픔, 외로움, 질투, 분노에서 경험치를 제대로 뽑아 먹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