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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ntata May 28. 2024

라몬 카사스_의식의 지배를 벗어난 나의 육체

장례식 후의 지친 몸, 의식의 지배를 벗어난 나의 육체, 신나는 무도회장

    

라몬 카사스__무도회가 끝난 후 1866 ~ 1932

장례식 후의 지친 몸

검정은 예의를 갖추거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장소에 갈 때 입는 의상이거나 파티 드레스로 인기 있는 색채이다. 장례식 역시 상(喪)을 치르는 과정에 예를 갖추어야 하므로 보통 상복은 검정이다.     

오늘 생각지도 못한 부고를 들었다. 갑작스러운 외삼촌의 죽음. 

나이 60에 미혼이다 보니 장례를 준비할 가족은 형제들이었다. 막내 남동생을 갑자기 하느님 옆자리에 보낸다는 걸 인정하기 힘든 누이들.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외할머니는 3대 독자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빈소가 차려지기 시작하고 첫 문상객을 맞으며 오랜 시간 장례식장에서 보내다 보니 몸이 지쳤다.     

널찍한 그린 패브릭 소파에 몸을 널브러뜨린 라몬 카사스의 <무도회가 끝난 후>라는 그림의 여성이 한없이 부럽다. 무도회라면 장례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모임이었을 텐데 지친 모습을 보니 썩 편한 자리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나도 편치 않은 자리 후엔 급격히 신체리듬이 다운이어서 맥을 못 추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장례식장의 문상객으로 잠시 다녀오는 경우가 아니고 가족으로 그 자리를 오랜 시간 지켜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눈은 힘을 잃어 피곤함이 역력하고 허리는 의자 등받이에서 점점 멀어져만 간다. 앉아 있기보다 어정쩡한 누임에 가깝다.      


의식의 지배를 벗어난 나의 육체

뇌의 명령을 어기며 몸이 움직이는 대로이었던 적이 잠시 아니 꽤 길게 있었다.

2015년 3월 따뜻한 봄이 올 무렵 나에겐 한없이 추운 겨울의 연속이던 시간이다. 지금도 이 시간을 몸이 기억하는 것인지 아프기도 하고 많이 늘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암이 자라고 있는 위의 상부와 위의 중간을 넘어 절반 이상을 잘라내고 다른 기관으로 전이 직전인 림프들도 잘라내었다. 식도와 소장을 잇고 남아 있는 일부 위를 소장과 잇는 우회술을 받았다. 이때는 빠른 회복이 된다고 하고 여러 좋은 얘기들을 해서 큰 비용을 주고 다빈치 로봇 수술을 했다. 나의 몸은 아직 무리였는데 일주일만의 대학병원의 침상은 비워 줘야만 했다.     

대학병원에서 요양병원을 추천해 주었지만, 어른들은 요양병원이라 하니 의식 없는 노령의 환자들만 있는 곳인 줄 알고 가기를 반대하셨다. 시아버님이 알고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식사의 문제가 있어 다시 요양병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내가 가게 된 곳은 수원의 외곽에 있는 요양병원이었다.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과 저학년이어서 손을 많이 필요로 했지만, 신랑이 아이들을 챙겨 주어서 몸을 회복하는 데만 신경 쓰기로 하고 입원했다. 1달여의 시간. 난 다시금 이유식을 시작하는 아이가 되었다.     

병원에서 미음의 유동식에 적응하고 여기 와서는 묽은 죽을 먹었다. 양은 숟가락으로 5~6숟가락. 대신 삼시 세끼가 아닌 삼시 육 끼가 기본이었으나 그렇게까지 식사를 챙겨 주는 병원은 없다. 식당 직원분들이 배려해서 퇴근하시며 한 끼를 더 주고 가셨다.      

위를 잘라내어 그랬는지 적게 먹었지만 배고픔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몸에 필요로 하는 영양소의 양을 먹는 양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 축적되어 있던 것들이 꺼내 쓰이게 되며 은행 잔고가 바닥나듯 내 몸의 영양은행 잔고는 밑을 보였다. 정상치 아래를 도는 항목들이 그래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몸은 의식의 명령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낮이었지만 깨어 활동할 시간임에도 부쩍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지만 추위를 타게 되어 두껍게 입은 겨울옷들을 벗어 낼 수 없었다. 노상 소파에 누워 맥없이 쳐져서 ‘일어나’란 뇌의 명령을 거스르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등하교하는 아이들을 껌뻑거리는 눈으로 인사해 주던 맥없던 시간으로 의식의 명령을 거스르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신나는 놀이터 무도회장

난 90년대 후반 학번이다. 20C의 클럽을 다녔다. 이때는 클럽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무도회장이라 불렀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던 21C의 클럽은 가본 적이 없어서 그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다니던 무도회장은 무대 높은 곳에 디제이가 자리하고(가수이거나 직업 D.J) 천장엔 레이저와 사이키 조명이 현란했다. 어두운 장소에 담당 웨이터의 명함을 끼워 둔 촛불 모양 라이트를 켜 두는 테이블. 무대 양옆으로 자리한 많은 테이블에 즉석 만남이 오갔다. 테크노 댄스와 토끼 춤, 레게풍 댄스곡이 인기이던 그 시절 친구들과 다니던 일명 무도회장 나이트클럽의 기억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범생다운 다소 심심한 학교생활을 하고 대학이란 곳을 갔는데 이곳은 신세계였다. 시간표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선택해서 짜고 땡땡이인 것을 쳐도 집에 연락하지 않았다. 1학년 때는 이제까지 책상에 앉아서 보낸 내 시간을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아빠의 통금 시간은 대학 가서도 있었지만, 막차를 놓치기 전에 까지 원 없이 놀았다.      

막차를 꽁무니에서 놓치는 날이면 택시를 잡아서 같이 타고 버스가 서는 다음 정류장까지 가주는 연하의 남자 친구도 있었다. 특히나 음주·가무를 즐겼었다. 술자리에 빠지지 않고 불려 다니던 과거의 나. 좋게 말하면 사회성이 좋아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것인데 나쁘게 말하면 남는 거 없이 시간만 보내던 시절이다.     

그때 나와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 동기들, 선배들은 뭐 하며 살고 있을까? 근황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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