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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목 Oct 25. 2024

엄마의 ‘해우소 일기’

화장실에서 쓰여진 엄마의 하루 일과 그리고 생각

‘해우소(解憂所)‘는 사찰에서 화장실을 일컫는 말로, ‘근심을 푸는 곳,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고 해석된다.


어느 날, 엄마는 ‘해우소 일기’라고 적힌 작은 수첩과 한 자루의 볼펜을 화장실 문고리에 걸어놓으셨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 하루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적어놓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 이후, 우리집 가족들은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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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결혼 후, 친한 이웃의 권유로 천주교 세례까지 받으셨다가 이혼 후에는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와 더불어 여러 풍파를 겪으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시면서 자연스럽게 종교를 멀리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던 중 내가 고등학생 때, 엄마는 집 근처에 위치한 사찰에 인연이 닿아 불교대학까지 다니게 되셨다. 부처라는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닌, 나도 부처처럼 살아야겠다는 점에서 흥미를 가지셨던 것이 아닐까?


엄마는 불교대학에서 마음 공부를 하시면서 어떻게하면 유학생인 언니와 수험생인 나를 이해하며 더 나은 방식으로 소통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시다가 수험생인 나와 소통을 하기 위해 ‘해우소 일기’를 정하셨던 것 같다.


해우소 일기에는 엄마의 일과가 간략하게 적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 시청에서 OOO 교육

  - 동료 OO와 점심 식사

  - 퇴근 후, 불교대학 강의

위와 같이 많으면 대여섯 개, 적으면 한 개의 이벤트가 적힌 엄마의 일과들을 보며 나의 수험 생활로 인해 줄어든 엄마와의 대화가 약간은 채워지는 듯 했다.


중간중간에는 엄마의 한탄같은 일기가 있었던 날도, 혹은 건너 뛰는 날도 있었지만, 엄마는 해우소 일기를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걸어두셨었다. 내가 집을 떠난 후에도 해우소 일기가 엄마의 근심을 풀어주는 좋은 친구였겠구나하는 생각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든닼


해우소 일기의 존재를 잊고 산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엄마 장례를 마친 후, 유품 정리를 하면서 그 동안 모아두신 ‘해우소 일기’ 약 10권을 발견했다. 엄마가 입었던 옷, 쓰시던 물건 등은 대부분 정리할 수 있었으나, 엄마의 필체로 써내려간 엄마의 일과가 담긴 이 해우소 일기 만큼은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매 글자 마다 엄마의 세상이 녹여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래서 이 일기들을 버리면 정말 엄마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까지도 잘 보관하고 있다.


녹록치 않은 세상 살이에 지쳐 맥주 한 캔으로 나마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을 때, 엄마의 ‘해우소 일기’는 나에게 위로를 주는 녹진하고 뭉클한 안주거리가 되어 이 세상에 엄마는 없지만, 엄마의 세상은 이 일기 속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살아갈 의지를 더 불어넣어주고는 한다.


그렇게 엄마는 어떠한 형태로든 내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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