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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옌 Jul 10. 2024

나의 시베리아 생존기(7)

우당탕탕 기숙사 생활(1)

러시아는 기숙사가 학교와 꽤 거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얘길 들어보니 학교, 기숙사는 공공재라  국가에서 각 도시에 땅을 지정해 주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먼저 학교부지를 정해서 짓고 기숙사부지를 받아 기숙사를 짓는 식이라 대부분 기숙사와 학교의 거리가 좀 됐다. (참고로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은 기숙사와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처음 기숙사를 배정할 때 1인실로 배정해 달라 부탁드렸고 깨끗한 방을 받았는데 나중에 러시아 친구들방에 가봤더니 내 방은 따로 리모델링이 된 방이었다.

원래 러시아는 방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구조라 바닥에 카펫 같은 게 깔려있는데 내방은 장판이라 바닥만 잘 닦으면 맨발로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방은 옛 창문이라 춥던데 내방은 창문도 바람이 새지 않는 새 창문이라 한겨울에도 반팔 입고 생활할 만큼  따뜻했다.


기숙사에는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 학생, 선생님들이 섞여 살았고, 가족, 부부 등이 같이 사는 방도 있어 구성원이 다양했다.

한국인이 몇 없어 한국인들 방을 모아놨는데, 앞방엔 한국오빠, 옆방엔 한국언니가 살았다.

한국언니는 내가 입학하고 1년 만에 졸업해 한국으로 갔고 오빠는 1년 더 있다가 졸업을 해서 좀 더 얼굴을 많이 봤는데 도움도 받았지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오빠는 밥이 없을 때마다 방문을 두드리고는

밥 있냐? 김 있냐? 먹을 거 있냐?를 늘 물어보곤 했다.

그 오빠는 고등학교 때부터 러시아에 살았고 러시아사람과 결혼까지 한 반 러시아인 이어서 러시아 친구도 많았는데 가끔 연극하는 안톤이 내방을 두드리곤,

"쏘옌, 김 있쒀?" 하고 자연스럽게 묻곤 했다.

안톤은 첨에 잘린 김을 보고 바퀴벌레 같다느니 징그럽다느니 질색했었다는데 몇 번 맛본 뒤론 술안주로 김을 찾곤 했다. 나중엔 방문을 열면 직접 들어와 찾아대서 김을 몰래 숨겨놔야 했다.


기숙사가 ㄱ자 모양인데 반대쪽 통로에는 중국언니가 살았다. 내가 도움을 많이 받은 한국언니의 절친이었다.

그 중국 언니는 주성치를 닮은 잘생긴 중국 아저씨와 결혼해 같이 살았는데, 요리도 잘하시고 친절했다.

내가 시베리아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한국언니와 중국언니가 같이 여행을 갔는데, 러시아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내가 걱정된 두 사람은 아저씨에게 나를 잘 돌보라며 신신당부하고 갔다.


아저씨는 의무적으로 밥시간이 되면 나를 불렀다. 이제야 알았지만 아저씨가 자주 해준 음식이 마라탕이었다.( 중국친구들이 마라탕을 몇 번 해줬는데 이름도 모르고 그냥 먹다가 최근에 마라탕이 유명해져서 보니 그때 먹은 게 마라탕이었다.)

당시 내가 말을 거의 못 했기에 우리 둘은 러시아어와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다 합쳐도 1개 국어가 안 되는 짧은 언어로 대화를 했다.


하루는 그 와중에 밥도 먹고 차도 마셨는데 아저씨가 그냥 보내기 좀 그랬는지 갑자기 장기판을 꺼내셨다.

그러고 장기 둘 줄 아냐 물었는데 내가 다행히 장기를 둘 줄 알았다.

근데 한국식과 중국식이 달라 서로 룰을 손짓발짓으로 알려줬고, 그만하잔 말을 못 꺼낸 소심한 나와 가라고 못하는 친절한 아저씨의 침묵의 장기가 시작되었다. 침묵의 장기는 거의 10판이 넘게 이어졌고 그날 나는 뇌를 너무 많이 써서인지 기절해서 잠들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나의 시베리아 생활은 '배려받음'의 연속이었다. 외로운 이방인이었지만 이방인이었기에 더욱 배려받았고 관심받았던 시간이었다.

러시아 사람들 차갑기로 유명하지만, 누구도 나에게 불친절한 적 없고, 인종 차별의 얘기들을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는 인종차별이란 걸 당해본적이 없다. 신기해하긴 해도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러시아 꿈을 꾸는데 크라스노야르스크가 나오는 꿈은 항상 기분 좋은 꿈이다. 물론 꿈에서도 난 버벅거리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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