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1부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시내버스로 통학했다. 하굣길 버스 안에서 어쩌다 해병들을 볼 수 있었다. 휴가 나오기 전부터 미리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그들은 거의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술 냄새가 진하게 풍기던 어떤 해병은 승객들이 희한하게 차려입은 자신을 흘끔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형형색색의 현란한 각종 마크로 치장된 휴가용 백을 어깨에서 내리더니 일단 버스 바닥 한가운데 툭 던져 놓고는 좌석이 여러 개 비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제 백을 거만스레 깔고 앉았다. 출발하는 버스가 낡은 기어를 여러 번 변속하는 바람에 앞뒤로 쏠려대는데도 그 해병은 전혀 아랑곳없이 검정 ‘쎄무(섀미)’ 군홧발에 있는 힘을 다 줘서 몸의 균형을 억지스럽게 유지했다. 그까짓 것 정도에는 결단코 미동도 할 수 없다는 투철한 해병대 정신을 그 고집 센 해병은 민간인들에게 체현(體現)해냈다. 널찍널찍 한 사각형 무늬의 통바지 한쪽 둔부에는 빨갛고 커다란 대한민국 해병대 엠블럼(emblem)을 박았다. 다른 쪽 엉덩이에는 잠수부가 헤엄치고 있는 컬러 패치도 붙어 있었다. 휴가용일 것이 분명한, 군복의 엠블럼과 패치들은 차치하고라도, 해병대 위장복은 실전에서 유의미한 위장 효과를 발휘하기엔 무늬들이 너무 널따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그는 들었다.
여름철이어서 그랬는지 개중 몇은 상의를 벗고 있었다. 쪄대는 여름은 해병대 정신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계절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대개 빨간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런 티셔츠의 등판에 가장자리를 재봉한 노란 헝겊으로 해병대라는 한자(漢字)가 큼지막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머리는 앞이마 바로 위쪽의 머리카락만 한 줌 정도 남겨둔 걸 빼고는 무슨 승려(僧侶)들처럼 박박 밀고 있었기 때문에 광이 날 정도로 번들거렸다. 그런 헤어스타일은 흡사 아파치(Apache)족 전사들 모양 사납고 저돌적이었다. 그것은 ‘상륙돌격형 머리’라 불리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의상들에는 사람의 두개골 눈구멍으로 뱀 한 마리가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의 약간 징그러운 로고와 여러 종류의 원색 휘장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 복장들은 강렬함이 지나쳐서 위협적일 정도였다. 버스 안의 민간인 승객들은 그런 차림새의 해병들이 갑작스레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취할지도 몰라서 지레 겁을 집어먹곤 했다.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무심코 그들을 관찰하다가 혹여 그 사나운 눈빛들과 마주쳐서 시비를 붙게 되지 않을까 조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들의 그런 현란한 복장들과 행동 양식에 대한 호기심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우악스러운 인상들과 뭔가를 일부러 드러내려는 것 같은 태도에는 우호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다. 타인들이 혹여나 저희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지 못하게끔 하려고 그들은 일부러 애쓰는 듯했다.
1949년 한국 해병대는 여수·순천 사건*1을 통해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검토한 뒤 미 해병대와 같은 부대를 목표로 하여 창설되었다. 해병대원이 쓰는 ‘팔각모’는 원래 미 해병대의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일본군의 수중에 있던 이오지마(硫黃島)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미군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 요충지였다. 그러나 섬 전체가 4백여 개의 토치카로 뒤덮여 있어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공략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미 제5해병사단은 3만 명의 병력과 880척의 LST를 동원해 상륙작전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옥쇄작전에 밀려 번번이 패퇴했다. 미 해병대는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가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지만, 일본군의 집중포화로 수많은 사상자만 낸 채 물러나야 했다. 미 제5해병사단은 마침내 여덟 번째의 공격을 벌인 끝에 결국 그 섬을 점령하였고,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다. 미 해병들은 이오지마에서 6800명이나 전사했으며, 미 해병대는 그 여덟 번에 걸친 투혼을 기념하기 위해 ‘팔각모’를 정식 복제로 채택했다. 미 해병대의 ‘팔각모’는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승리가 곧 미국의 승리와 전쟁의 종식으로 이어졌다는 자부심과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불명예보다는 죽음을(Death before dishonor)’ 등의 구호도 팔각모와 함께 등장했다.
그 같은 미 해병대의 전통을 대한민국 해병대는 다수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해병대는 그 모자의 8각을 신라 시대 화랑도 정신인 5계(五戒)에다 욕심을 버리고 유흥과 허식을 삼간다는 3가지 금기(禁忌)를 포함, 8계(八戒)의 뜻을 함축한다는 식으로 대원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어차피 거쳐야 할 군대 생활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좀 더 무던하고 냉정하게 단련하길 희망했다. 한때 그 화려한 해병대에 지원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종국에는 썩 내키지를 않았다. 그는 겉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안으로 차는 어떤 것이 더 필요했다. 방위 취약지구였던, 그가 떠나온 소도시는 집에서 출근하는 18개월짜리 방위병(防衛兵)*2들 천지였다. 호프집들과 학사주점엔 저녁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퇴근한 방위병으로 득시글거렸다. 그들은 엿 같았던 하루를 술 퍼마시는 걸로 상쇄(相殺)시켰다. 그러면서 그전엔 원래 친구였던 제 선임병들을 씹고 부대를 욕했다. 그들의 요란스러운 대화, 아니 욕설을 들어보면―어디서든 그냥 들려왔다―그들이 다니는 부대는 특수부대 저리 가라였다. 아침엔 출근해선 계급 높은 놈에게 맞고, 저녁엔 시내 술집에서, 계급은 낮지만, 주먹은 더 센 놈에게 걸려 다시 처맞는 일과가 무한 반복되었다. 그런 꼬락서니들에 질려 현역으로 가고 싶은 이들은 해병대로 몰렸다. 하지만 거긴 물론 지원한다고 해서 다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요행히 해병이 된 이들이 휴가를 나오면 성난 아파치족처럼 죄 없는(?) 방위병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 해병대 지원에 떨어져 방위소집이 늦어진 이들은 이제 학교 후배 선임병들에게 맞았다.
그의 본적(本籍)이 그 동네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먼 동해안, 부친의 고향까지 가서 신체검사*3를 받았고 그 소도시에서 몇 되지 않는 안 되는 1급 현역 입영대상자가 되었다.
어쨌든 그는 한 학기를 겨우 다닌, 어느 큰 항구도시에 있는 모 전문대를 휴학한 뒤, 왜 그랬는지 두어 번 입영을 연기하면서 하릴없이 먼 도시들을 떠돌거나 동네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그렇게 쥔 푼돈으로 서점을 들락거리거나, 대화가 될 듯한 몇 방위병 친구들과 대폿집*4에 드나들면서, 빈속에 퍼마신 막걸리에 취해서는 설익은 니체(Nietzsche)를 제 딴에는 제법 심오하게 설파해 댔다. 그러다가 꽤 오래 한동안 시골집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볼품없는 청춘을 보내다가 그는 결국 육군으로 징집되었다.
*1 1948년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내의 좌익세력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일으킨 반란 사건. 이 사건 이후 서수(序數) 4는 한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가상의 부대명으로 서수 4를 사용한다.
*2 1969년 4월에 제정, 공포된 ‘병역법’에 의거하여 제도화되었으며 한국 특유의 병역 방식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징집 대상자가 1970년대 초부터 현역 징집 수요를 초과하게 됨에 따라 잉여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병역의무의 형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3 병역의무를 부과하기 위하여 내과·외과 등 징병검사 전담 의사 또는 징병검사 전문의사가 신체의 모든 부위를 검사하여 1급 내지 7급까지의 신체 등위를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1987년 당시 1, 2급은 현역입영대상이었다.
*4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 막걸리는 보통 큰 술잔에 마시기 때문에 ‘대폿술’이라고도 한다. 대포(大匏)는 ‘큰 바가지’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