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래 장편소설 《이탈-그 여름의 추억록》 제1부
분열 연습만 계속되던 그 주 토요일, 후끈하게 달아오른 연병장을 여전히 끝도 없이 돌고 있을 때였다. 유기철이 불리어 나갔다. 유기철이 대열에서 빠져나간 지 삼십 분쯤 지났다. 그의 구대 대열이 위병소 옆 플라타너스 그늘 가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 나무들 안쪽에서 유기철은 작은 꽃무늬들이 박힌 하얀 원피스의 여자를 부둥켜안고 앉아 있었다. 하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짙은 초록의 그늘 속에 앉아 있는 그녀의 잔영은―그녀가 안겨있는 시커먼 훈련병을 빼면―미술 교과서에 수록된 명화 속 소녀처럼 여리고 고왔다. 그녀의 살결에서도 하얀 광채가 났다. 지난날 제가 울렸던 여자를 허락받은 그 한 시간 내내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장면은 자극적이었다.
유기철이 나무 그늘에서 천국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훈련병들은 연병장 돌기에만 집중하기 위해 잡념을 차단하려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행진코스는 그 꿈결 같은 나무 그늘 가를 계속해서 지나가게끔 되어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엄청난 열기를 내리쏘고 있었지만, 그의 등짝 역시 썰렁해졌다. 하필이면 하얀 원피스라니. 카키색과 하얀색은 환상적으로 어울렸다. 여자 하나 없이 군대에 온 건 잘못한 일 같았다.
그에겐 여자가 없었다. 예전에는 어떤, 본시 성정 자체가 냉랭한 소녀가 하나 있었긴 했다. 그 소녀를 만난 건 서로 중3 때부터였다―그가 중3 때부터 교복이 자율화됐다―.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의《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에 나오는 찻집 여급 ‘밀드레드’와 같은 그 여학생과의 3년은 대단히 괴롭고 모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굴 사랑할 수 있는 감정 같은 건 쥐뿔도 없는 듯했다. 그녀는 옷가지 같은 것들만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약간 마른 몸매에다 작지 않은 키에 그 옷들은 잘 어울렸다.
그녀는 항상 얼굴을 약간 찌푸리는 편이었다―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무모하게도 그는 자신이 노력함으로써 그녀의 얼굴을 환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3년씩이나―. 하지만 그를 만나러 나올 때 그녀의 옷은 예뻤고 그게 그를 기쁘게 했다. 자신과 만날 때마다 옷에 신경 쓰는 모양으로 보아 그녀는 내심으로는 자신을 진짜 좋아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언제나 차가웠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옷만 잘 입었다. 그는 그 찌푸린 표정과 밋밋한 가슴까지도 사랑했다. 그녀가 어쩌다 새침하게라도 한번 웃어 줄 때―그가 뭔가를 선물했을 때―면 절망적으로 행복했다. 절망감을 수도 없이 곱씹고 나서야 모든 것은 멍청한 자신의 오해라는 각성이 들었다.
끝 모를 비참함을 그는 더는 견뎌내지 못했다. 헤어질 때마저도 구차스러웠다. 그 후 그는 영원히 그녀의 본심을 알지 못하게 된 채 막연한 서러움을 소주잔에 타 마시며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 당시 그 계집애가 자기를 버리지 않았던들,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크눌프는 생각하는 것이었다. 라틴어 학교의 공부도 게을렀으나, 그래도 좀더 다르게 될 수 있는 힘과 의지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편안하고 명랑한 생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그는 자포자기가 되어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였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내버려 두어, 아무것도 그에게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외자, 방랑자, 방관자가 되었다.」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Knulp. Drei Geschichten aus dem Leben Knulps》
오랜만에 그 밀드레드가 떠오르자 씁쓸했다. 그때부터 그는 연병장의 끝없는 트랙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걷기로만 했다. 하루는 길고 길었다. 태양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훈련병들의 살갗을 지져대면서 체액을 빨아올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