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이걸 왜 이해 못 해? 아유 답답해! 아니예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가끔 이런 생각 해 보신 적 있나요?
아유~! 왜 이걸 이해 못 해? 이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예요. 사실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이제부터 그 이유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간에 소통하는 방법을 알아 보려고 해요.
사실 이해라는 건 굉장히 개인적인 현상이예요.
일단 "안다" 는 단어부터 보죠. 우리는 알기 위해서 먼저 "배우는" 과정을 거쳐요. 배운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것이고, 그 경험은 우리의 뇌의 한 구석에 저장이 되죠.
배운 것을 다 기억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정보라도 일단 "경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거든요.
곰곰히 생각해 보죠.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에 대해 "왜 당연하지?" 라고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나요? 그게 무엇이던지 간에 계속 "왜? 왜?"하고 파고 들다 보면, 결국에는 막다른 길에 부딪히게 될 거예요. 여러분들의 "이유"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유라는 걸 깨닫게 되겠죠.
예를 들어, "남을 때리는 건 나빠"라는 명제에서 시작하죠. 이해를 돕기 위해 철수와 영희의 대화를 써 볼게요.
철수: 남을 때리는 행위, 즉 폭력은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그 폭력을 막지 않을 경우 그 폭력이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 있어.
영희: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건 왜 나빠? 그럼 병원에서 주사를 놓는 간호사는 나쁜 사람이네? 그리고 내가 나에게 돌아오는 폭력을 괜찮다고 받아 들인다면 그것 또한 나쁘다고 해야 해?
철수: 간호사가 나에게 아프게 하는 건 내가 동의 했잖아. 내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까.
영희: 그럼 아이들은? 부모는 동의하겠지만 아이들은 동의하지 않았잖아?
철수: 아이들은 무엇이 좋은 지 모르잖아. 다소 아프더라도 그게 아이를 위한 거니까 그걸로 폭력이라고 할 순 없지.
영희: 그럼 왜 맞는 지 모르고 맞으면 그건 정당화 될 수 있는 폭력이겠네? 무슨 좋은 뜻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아이들에게 일일이 이게 왜 좋은지 설명하지 않고,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부모와 간호사는 아이를 아프게 해. 그럼 상대방을 아프게 하기 때문에 폭력이 나쁘다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같은 이유로 그 폭력이 나에게 돌아와도 그 폭력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 지 모르기 때문에 역시 폭력이 돌아오는 것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철수: 하지만 "때린다"는 행위는 보통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하는 거잖아? 선의를 가지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과는 다르지. 상대방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나를 아프게 하는 행위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나쁘지는 않은 것 아니야?
영희: 좋아. 그럼 때린다는 것의 정의가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하는 행위라고 해 보자. 그런데 상대방이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혀 왔다면? 상대방의 악의를 갚기 위해서 때리는 게 뭐가 나빠?
철수: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고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고 하더라도 내가 물리적인 폭력으로 되갚는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잖아. 괴롭힌 건 증명하기 어렵지만 때린 건 증거가 바로 남으니까.
영희: 그럼 그런 폭력에 관한 법이 없다면, 혹은 유명 무실하다면 때리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것 아니야? 어차피 문제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철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건 나쁜 생각이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야.
영희: 그럼 상대방의 괴롭힘을 그냥 당하고 있어야 해? 예를 들어 상대방이 나를 계속 때린다고 해 보자. 그럴 때에도 나는 상대방을 따리면 안되는 거야? 법이 없거나 유명 무실하다면, 상대방의 폭력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맞서 싸우는 것인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폭력이잖아?
철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결국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돼. 내가 더 힘이 세서 싸움에서 이겼다고 해 보자. 그럼 싸움에서 진 사람이 그대로 있을까? 더 힘 센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 할 수도 있어. 그럼 이 문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지. 누군가는 죽어야 끝날 수도 있어. 만일 상대가 폭력으로 나를 생대한다고 해도 내가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끝날 수 있겠지.
영희: 과연 그럴까? 상대방과 계속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면 폭력만큼 상하 관계를 정리하기 좋은 방법이 없잖아.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지속적으로 더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자기가 다른 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폴 수도 있지. 이게 과연 더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의 대화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맞다"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명제는 사실 수 많은 의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위의 명제, "사람을 때리는 것은 나쁘다"는 사실 법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성립될 수 없는 명제인 것입니다. 법이란 그 사회의 대부분이 동의하는, 혹은 그 지역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에 동의하도록 정해진 조항 들입니다. 일부의 사람이 그 것이 싫다고해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죠. 거칠게 말하면 "힘"을 가진 다수가 "힘"을 갖지 못한 소수를 제어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이죠.
그럼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을 휘두르는 것은 괜찮고요? 그 이야기는 더 긴 이야기니까 일단은 여기까지 하죠. 일단, 핵심은 나에게 "당연한" 일이 상대방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요. 특히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명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이해한다"는 말이 "배우다"와 거의 비슷한 말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해와 학습, 둘 다 결국에는 뇌에 정보를 집어넣는 다는 말이고, 이해는 이미 학습된 정보들 간의 연결 관계를 뇌 안에서 정립해서 충분히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근거를 납득하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100세 노인이라고 합시다. 여러분이 어릴 적에는 산에서 호랑이가 나오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실제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산에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갔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죠. 여러분에게 "산에는 호랑이가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집에는 TV도 없고, 여러분은 산골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 지 잘 모르죠. 그런데 정보가 없다 보니 세상이 변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무엇을 모르는 지도 모르죠.
누군가가 "산은 호랑이가 나와서 위험하다"라고 말을 한다고 해 보죠. 100세 노인인 여러분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고 동의할 겁니다. "그렇지! 그러니 산에는 혼자서 가면 위험한거야." 라고 말하고 자신의 경험에 만족합니다.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자, 이제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이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해 봅시다.
"아니 무슨 개 풀뜯어먹는 소리야? 호랑이가 여기서 왜 나와? 차라리 벌레에 물려서 위험하다고 해라!" 그렇게 얘기하고 피식 웃어 버릴 겁니다. 계속 "아냐! 호랑이가 나와서 위험하다니까? 절대 가면 안돼!" 라고 하면 어쩌면 미친 놈 취급을 할 지도 모릅니다.
위의 예에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 간에 얼마나 다른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위의 예들은 쉬운 경우들 입니다. 저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자신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정치적인 문제로 가져 가 봅시다.
야당과 여당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니 여당 지지자들 저새끼들은 대체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저딴 말도 안되는 법을 지지하고 있어? 분명히 돈 먹었겠지!" 라고 합니다. 여당 지지자들은 "아니 경제가 발전해야 시민들의 삶도 나아지는 거지! 저렇게 짧은 시각으로 멍청한 생각을 하는거 정말 문제야 문제!" 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여러분이 생각하는 게 "당연한 사실"인가요?
정치에 대의 명분을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대의 명분"만큼 공허한 것이 없습니다. 과연 내 삶이 곤궁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대의 명분"이 있긴 한가요? 당장 내 가족들이 사고 싶은 것을 못 사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누군가 얘기하는 대의 명분을 지지할까요? 누군가는 더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비동의"는 침묵으로 이루어 집니다. 몇 몇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는 절대 다수의 침묵을 묻어버리고 마치 그 "대의 명분"이 다수의 동의를 받은 것 처럼 포장합니다. 여기에 "대의 명분"의 함정이 있습니다.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별 상관 없는 정도", 그리고 다수의 "침묵"을 이끌어 낼 정도의 "균형있는" 명분, 그게 아니라면 어릴 적부터 교육(혹은 세뇌)에 의해 반대하는 것이 불편하게 된 행위나 현상을 이용합니다. 그들의 "대의 명분"에는 "반대하기 껄끄러운" 조항이 항상 들어갑니다. 이건 우리가 "당연"하다고 하는 문제들이 얼마나 다수의 "동의"에 의존하는 지 알려주는 증거 입니다.
정치는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 와 "소통"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 남녀 간의 대립이 많다고 합니다. 성차별이니 역차별이니 말이 많습니다. 서로 F니 T니, 지금까지 많이 받았잖아! 나는 안 받았는데? 뇌가 비었네, 이해력이 딸리네, 등등... 서로 일부의 행위, 현상, 사실들로만 치고 박습니다.
정말 그런 것들이 중요할까요? 누가 무엇을 더 받고, 덜 받고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닐 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 같은 것은 결코 나올 수 없으니까요. 애니메이션 Zootopia 보셨나요? 토끼와 여우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반목을 하고, 오해를 하고, 결국에는 음모가 밝혀지고 서로 다시 화합합니다. 그런데, 그 애니메이션과 달리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 개개인이 모두 행복한 결론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을 먹어야 삽니다. 초식 동물을 만족시키겠다고 육식동물이 굶으면 육식 동물에게 불공평하죠. 그렇게 태어 났는데요. 그렇다고 육식동물에게 먹이기 위해 초식동물을 죽인다? 그럼 초식 동물에게 불공평하죠. 남녀 문제는 다르다고요? 정말 다를까요?
누가 육식이고 초식이고는 따지지 맙시다. 그런데 신체적인 차이점과 정신적인 차이가 있다는 건 다들 동의 하잖아요? 내가 상대방을 다 이해한다? 그건 오만이자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같은 성별을 가졌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힘든데, 다른 호르몬에 의해 평생 다른 것을 봐오고 경험한 개체들 간에 100% 이해가 존재할 리 없죠. 마치 육식 동물이 초식동물을 이해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될 거예요.
그럼 어쩌자고?
다르니까 평생 서로 이해하지 않고 이대로 가자고?
물론, 그건 아니죠. 일단 우리가 다르고, 상대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받아들이자는 거죠.
심리치료에서도 가장 처음에 하는 건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하지 않는 이상 개선은 힘든 일이죠.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네. 바로 배우는 거죠. 충분히 "납득"할 만큼 경험을 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겁니다.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으면요? 네. 시간을 함께 보내야죠. 싸우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토론도 하고, 약점도 보고, 강점도 보고...
하지만 요즘 보면, 모두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드라마, 유튜브, 소설, 만화 등등 수 많은 매체로 경험한 것들이 마치 "사실"인 양 받아들여 집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합니다. "이해"를 하고 있긴 하겠죠. 그런데 우리의 "이해"가 결국 내가 "경험했던" 기억에서 오는 거라면요? 내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다면요? 내 경험이 충분했다면 상대방이 왜 화를 내는지 알고 그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아직도 서로 싸우죠? 상대방이 하도 말이 안통해서 싸운다고요? 나에게는 하나도 안 주려고 하고 자기만 아득 바득 이득을 보려 한다고요?
정치라고 하면 덮어 놓고 피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정치는 웬지 더러운 것 같고, 올바른 것이 아닌 이득을 위해 싸우는 것 같고, 왜 그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정치는 그런 게 아니예요. 사람 간에 서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면서 서로 균형있는 만족을 하기 위한 기술이예요. "균형"이라는 건 조금 어폐가 있네요. 결국 정치를 잘 하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 가는 건 사실이니까요.
중요한 건, 정치라는 건 내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져오기 위한 의사 소통 기술이라는 거예요.
여기에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기 위해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건 하수 들의 방법이예요. 그건 정치라고 부를 수도 없죠. 오히려 폭력이라고 불러야겠죠. 그 힘이 유지되는 한 괜찮을 지 모르지만, 그 힘이 약해지는 순간 있던 것도 빼앗기게 되겠죠.
진정한 정치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면서도 상대방에게 불만을 갖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줘야죠.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걸 얻게 해 주거나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제공해 주면 되는 거예요. 동시에 혹은 그 이후에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해서 가져와야죠.
그걸 어떻게 하죠? 상대방에게 물어 볼까요?
아니죠, 아니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몰라요. 살아가기도 바쁘고, 스스로 돌아 볼 시간도 없고, 의외로 무엇이 가장 나를 만족하게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걸요? 어떤 경우에는 그게 시시 각각 바뀌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요.
그럼 어떻게 해요?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하죠. 그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세상에는 수 많은 가치가 있고, 의의로 내가 원하는 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모두 가지려 하지 말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게 아니라면 내어 놓으세요. 단, 그냥 내어 놓아서는 상대방이 행복감을 느낄 수 없어요. 그건 하수나 하는 짓이죠. 상대방이 생각치도 못한 시기에 상대방이 가장 기뻐할 만한 것을 내어 놓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고 생각 해 보죠. 마트에서 아이들이 사 달라는 걸 다 사 주는 걸 더 기뻐할까요, 예상 하지 못했을 때 옷장을 여니 들어 있는 선물 상자에 더 기뻐할까요? 아이가 아니라 여러분은 어떤가요?
다시 남녀의 문제로 돌아가죠.
남자/여자의 구도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문제를 풀기 어려워지는 게 바로 이 지점에 있어요. 남자도 여자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죠. 물론 호르몬과 같은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일부 비슷한 것이 있긴 하겠죠. 그런데 그걸 남자/여자로 뭉뚱그려서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래서 그들이 뭘 원하는데?" 라는 물음에서 막히기 마련이죠.
물론 신체적인 차이로 인한 확실한 문제는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군대문제, 출산 후 육아 휴직, 생리 휴가 등과 같은 문제는 실제로 존재하는 성별로 인한 문제입니다. 여성의 생리는 생각보다 전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물론 제어가 어느정도 가능은 하지만 남성보다 감정적인 부분들 또한 군대의 상명하복문화에 잘 맞지 않습니다. 일부 성공적인 적응을 한 여군도 있긴 하지만, 그들이 남성들보다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군대에 더 잘 맞다는 이유로 가장 화려할 수 있는 나이에 2년간을 갇혀 있어야 하는 건 굉장히 큰 희생이죠. 여성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생리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에서 꼬박 반 달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 힘든 상황이 서로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는 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후대를 위한 일입니다. 여성의 생리 또한 인류가 후대를 잇기 위한 것이죠. 두 성별 모두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여성의 생리는 아이를 낳고 아니고를 따지면 문제가 복잡해 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 자체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개싸움이 되는 거지요.
그 "희생"으로 "잃은 것"을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이냐에 집중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보상이 적절한 지를 논의해야죠. 여기에 "나 힘들었으니까 내놔" 같은 논리는 문제를 풀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힘듦을 수치화 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위에 얘기했듯이 개인차, 성별차에 따라 느끼는 것도 다르기에 이해하지 못할 것에 대해 누가 옳다고 얘기하는 건 포기하는 게 더 빠를 겁니다. 국가의 차원에서 "보상"하려면 누가 더 "힘들"었다가 아니라 누가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얼마나" 잃었느냐, 그리고 그것이 공익에 도움이 되느냐로 산정해야 합니다.
그건 "시간"이죠. 출산으로 잃게 되는 시간, 군생활로 인해 잃게 되는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해 줘야 합니다. 생리로 인한 영향은...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더 나은 복지가 필요할까요? 시각이나 보행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과 같이 여성이 생리로 인해 느끼는 피로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돕기위한 시설같은 것들이 필요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위의 어떤 것도 남녀간에 싸울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싸우는 이유는 달리 없습니다. 내가 더 힘드니 너는 닥치고 내 말 들어와 같은 대화 방식이 문제인 듯 합니다. 혹은 그까짓 거 힘든 축에도 못끼니 말도 꺼내지 마 같이, 상대방을 까 내리고 상처입히는 말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로 찌질하게 "와 어떻게 그런말을. 나 상처입었어" 와 같은 말을 하면 꼭 지는 것 같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대의 명분"을 찾는 겁니다. 싸움의 이유가 되지도 않고, 주어도 손해가 가지 않는 것을 아득바득 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겁니다. "내 눈에 눈물내면 니 눈에서는 피눈물 나는거야" 같은 치졸한 감정, 그런데 그걸 또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겁니다.
그러고도 서로 이해해 달라고 징징거리고 있잖아요. 서로 무엇을 느끼는지도 모르는 데 어떻게 이해해요? 부끄럽다고요? 그냥 알아 달라고요? 아니죠. 공감을 원한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해야 해요.
그런데 모르는 걸로 서로 알려고 하지 않고, 부끄러우니 숨기고, 귀찮으니 알려 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다는 오만함을 스스로 깨우치지도 못하고 계속 평행선만 달리고 있는 거예요.
남자/여자로 서는 문제를 떠나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면, 상대의 경계를 먼저 허무세요. 내가 상대방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하세요.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요? 본인의 의도를 완벽하게 숨기거나, 진심이 되는 거예요.
둘 다 어떤 것이 틀린 방법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없는데 그게 사실과 뭐가 다르죠? 하지만 상대방도 바보가 아니고 어지간히 스스로를 감추는 데 능숙하지 않다면, 내심과 다르게 의도를 숨기는 건 쉬운 길이 아니예요.
진짜 쉬운 길은 스스로 진심이라고 믿는 거죠. 상대방의 친구가 되어 주고자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자 하는 사람에게 상대방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거예요.
저는 무조건 적으로 상대에게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예요. 좋은 관계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쉬운 길은 본인 스스로가 친구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죠. 그래도 상대방이 여전히 방어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이득만 얻으려 한다?
스스로 물어 보세요. 상대방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내가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을 상대가 가지고 있는지. 만일 그 답이 "그렇다"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왜 잘못이죠?
저는 국제 결혼을 했어요. 의도한 건 아니었고, 전 여친과 헤어지고 홧김에 가입한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가 국적 불문하고 가입할 수 있었거든요. 거기에서 미소가 마음에 드는 여자의 사진을 보고 안 되는 영어로 만나자고 하고, 만남이 잡히고... 어찌저찌 하다 보니 3개월만에 프로포즈 하고 1년 뒤에는 결혼 식까지 올렸죠. 나이도 있었지만, 연애를 몇 번 하면서 될 관계는 되고 안 될 관계는 안된다는 운명론을 믿게 되었거든요.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제가 제 아내라는 사람에 대해 그닥 많이 알지 못하고 결혼 했다는 거예요. 그런 데다가 중국계 미국인, 부모님들은 영어도 잘 못하시고, 저는 중국어는 아예 모르고... 그것도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은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만다린)을 쓰지 않고 광둥어(캔타니즈)를 쓰거든요. 배우기에도 애매했죠.
3년 간 한국에서 살다가 아내가 임신하고 미국으로 간 뒤에 자기 가족들이 주변이 있어서인지 아내도 자기 본 모습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한국에 있을 땐 그렇게 착하던 아내가 임신 후 홈그라운드로 가니 어찌나 말이 안통하는지... 한국에서의 상식도 안 통하고, 졸지에 인종차별주의자 취급도 받고, 정말 황당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데다가 미국에 왔으니 한국어는 완전 까먹었는지 부부싸움에서도 영어로 하는데 짧은 영어로 다툼이 되겠어요? 상대방의 마음에 드는 단어를 골라 써도 상대방의 화가 풀릴까 말까 하는데, 내가 아는 단어로 그냥 직진을 해 버렸으니, 싸움이 거세지는 건 한 순간이었습니다.
결국에는 내가 알던 "상식"이라는 건 "한국"이라는 우물에서만 옳은 사실이라는 걸 받으들이는 날이 오고야 말았죠. 스스로 사실이라고 알던 사실을 부정하는 건 쉬운 과정은 아니었어요. 이걸 부정하면서 이해하려 하면, 저게 가로막고, 저걸 부정하면 내 스스로의 소신이 흔들리고, 소신을 지키려 하면 도저히 말이 안되는 상황이 수시로 일어났죠. 그러다 보니 남녀의 관계도 다르게 보이더군요.
내가 나의 생각, 또는 소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삶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삶의 근간이 이미 흔들렸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것의 가치가 결코 적은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내가 알던 모든 "사실" 혹은 "상식"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만 통하는 것일 뿐,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상대를 더 이해하면 이해 할수록 상대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별 것도 아닌 작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부부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아내가 무엇을 원한다고 말할 때 그걸 그대로 들어주는 건 그래서 하수나 하는 짓이죠. 상대방의 진의는 상대방의 말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지식과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종합해서 "이해" 해야죠. 서로 맞지 않는 정보에 "연결"해서 "이해"를 시도하면 당연히 잘못된 답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마세요.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상대방도 당신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될 거예요.
내가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고 시도하면, 상대방도 나 만큼은 아닐지라도 조금은 솔직해 질 거예요. 상대방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세요.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큼, 상대방의 말을 들어 주세요.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만큼 나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조금씩 서로를 "적셔" 가는 거예요. 너무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만일 일어난다면 그건 "운"의 영역이지, "일상"의 영역이 아니예요. 그리고 우리는 "운"에 감사하고 "일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일상의 영역에서 한 마디 말이라도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게 정치의 첫 걸음이자, 소통의 첫 걸음입니다. 나의 것을 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지, 필수는 아니예요.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을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는 것에 대한 부담을 내려 놓으세요. 나에게 필요한 것을 그게 필요도 없는 사람에게 주는 건 선행도 뭣도 아닌 손해 뿐인 바보 짓에 불과합니다. 소통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요. 스스로 행복해지고, 행복을 나눈다고 생각하세요. 단,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하세요. 그리고 내가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을 찾으세요.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갖지 않은 것,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해도 괜찮아요. 다들 그렇게 살아갑니다.
내가 먼저 행복하면, 내 행복을 나누는 법도 알게 됩니다. 나누어서 더욱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고, 그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 지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쉽고 빠르지만 확실한 길은 없어요. 하지만 어렵고 느려도 확실한 길은 분명히 있어요. 당신이 상상하는 행복한 미래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습이라면, 모두 다 갖는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내가 진정으로 갖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세요. 소통의 목적을 잊지 마세요. 결국 소통도 스스로가 행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