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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광기의 시절

by 설영



어느 날, 소아과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겨우 앉는 걸 보니 아직 첫돌이 지나지 않은 듯한 아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 보며 화면을 넘기다가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스마트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기에게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기는 한참을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해야지.”라는 아기 엄마의 말이 새삼 다정했고 나는 어떤 어른으로서의 작은 역할을 겨우 해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때 서둘러 스마트폰을 집어넣던 느낌은 흡사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쳐 얼른 비벼 끄는 것 같았다. 보여줘서는 안 될 모습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은 모두 손에 네모난 것을 들고 주위를 차단할 것만 같이 뚫어지게 쳐다보며 엄지만 까딱 까닥하는 어떤 로봇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주위에 어른들도 하나같이 스마트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아기의 엄마와 나만 빼고. 더욱 놀랐던 것은 소아과에서 대기하던 아이 보호자는 아기띠에 아기를 안은 채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장면이었다. 물론 아기는 스마트폰과 보호자를 동시에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나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들었다. 아픈 아기를 돌보며 병원까지 챙겨 나왔을 보호자의 고단함과 무슨 말을 기다리는 듯한 아기가 보호자를 바라보는 기대감 같은 것들이 동시에 느껴졌다.

지루함의 연속, 무엇인가를 오래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을 본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우리를 본다. 어떤 광기를 느끼는 장면이 있다. 도란도란 식사를 하는 식당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쥐고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어떤 기괴함을 느낀다. 마트 카트 안에서도, 놀이터 벤치에서도, 건널목에서도 항상 스마트 폰을 쥐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섬뜩하기도 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아이들 잘못이라고 단언했었다. 요즘 애들은 왜 저럴까 하며 ‘라떼꼰대’같은 생각도 서슴지 않았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게 과연 아이들만의 잘못인가 싶다. 스마트폰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것도 어른, 사주는 것도 어른, 스스로도 스마트폰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나를 포함한 어른이다. 우리는 언제 왜 사줘야 하는지 스스로도 명확하지 않은 채 남들이 사주니까, 불안하니까, 내 아이 친구들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이른 나이에 사준다. 조금 지루하고 심심한 순간들을 못 참는 건 과연 아이들일까 어른들일까도 자문해 보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스마트폰과 거리를 두게 하는 편이다. 물론 잡음도 많고 반발도 많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부분은 지루함을 스스로 소화하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즈음의 현대인은 심심함을 즐기지 못한다. 심심할 틈이 없이 스마트폰을 켜고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심심하고 지루한 상황에 계속 노출되고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시간을 채우는 연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아이들과 그 시간에 끝말잇기, 절대음감대결, 스무고개 등을 즐기기도 하고 더러는 짧은 대화를 시도한다.


코로나19가 한창 막강하던 시절,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어 영유아들이 타인의 표정을 읽을 기회가 없어진 탓에 대인관계를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나는 동네에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최대한 눈에 힘을 줘서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되기에 입가에도 함박 미소를 머금고 인사해 줄 수 있다. 그런 작은 행동들이 스마트폰에 미쳐있는 어떤 집단 광기 서린 이 시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른다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밖에 우리가 발 딛고 사람들과 부딪는 세상이 있다. 얼굴을 마주 보며 눈으로 인사를 건네고 때로는 내 목소리와 상대의 목소리를 함께 섞으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이 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곳은 스마트폰 안에서 만의 세상은 아니다. 한때는 아이가 자고 있는 방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여러 사람이 뿜는 자욱한 방안 공기가 익숙했었다. 지금 아이 앞에서 담배를 비벼 끄는 행위처럼, 어린 아이나 타인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는 스마트폰을 넣고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날이 올까 기대해 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이 시절을 집단 광기의 시절이었다며 씁쓸하게 추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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