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가 되자마자 우리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10회 차 인문학 독서모임을 꾸렸다. 남자 고등학생과 인문학 독서가 서로 착 달라붙는 맛을 기대하며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바쁜 입시 준비 속에 인문학을 가까이하기 바랐던 교사의 사심을 한껏 담았다. 처음에는 독서 활동을 꾸준히 하면 생활 기록부에 활동 내용을 기록해 준다고 설득했었다. 잿밥에 관심을 더 뒀더라도 일단 모집 흥행은 성공했기 때문에 첫출발부터 순항이었다.
우리가 읽은 책은 김완의 [죽은 자의 집청소]와 박웅현의 [여덟 단어]였다.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도서관에 모여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고 그 과정을 기록지에 담았다. 나는 학생들과 하는 이 독서모임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판타지 웹소설도 아닌 인문학 책이 태블릿으로 보는 웹툰, 체육관의 농구공, 친구들과 몇 판 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 여자 아이돌 무대영상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제쳤다는 사실은 좀 짜릿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여러 얘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학생들에게 [여덟 단어]를 읽은 후 ‘내 인생의 세 단어’를 생각해 보고 그 세 단어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서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사실은 가볍게 책에 대해 부담 없이 이야기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서 학생들이 아무말 대잔치를 하더라도 조금은 허용해 주겠노라 다짐하던 차였다.
“누가 먼저 얘기해 볼래?”
“아, 쌤. 근데 이거 먼저 하려니 너무 떨리는데요. 생각할 시간 좀 주시면 안 돼요?”
“맞아요. 시간 조금만 더 주세요.”
하기 싫어서 꾀부리려고 시간을 더 달라고 한 건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일단 눈빛은 진지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여덟 단어라는 책도 읽었고, 책 내용이 엄청 난해하지도 않아서 이해도 했을 테고, 인생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 여덟 개를 다 읊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세 단어 얘기하는 데 뭐 그렇게까지 떨리고 생각이 많아질 것인가 싶었다.
17명의 학생들이 발표를 차례차례 할 때마다 나는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학생들 서로 간에 중복되는 단어가 거의 없었다.
거기에 학생들의 진심은 있었고 건성은 없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단어 중 하나를 "여행"이라고 답한 학생이 있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인생을 여행으로 생각한다면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힘든 일도 있고 웃긴 일도 행복한 일도 모두모두 마주하는데 결국 여행은 끝나기 마련이며 특히 힘든 일도 지나가더라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기더라도 오래 멈춰 설 필요가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다. 듣고 있던 나와 학생들은 "오~~~"하는 낮은 감탄을 일제히 보냈다.
나는 아마 이 독후활동에 기대치가 너무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하라니까 억지로 대충 얘기하거나 소위 "드립"이라고 얘기하듯 농담 섞어 몇 마디 할 줄 알았다. 생각보다 진지했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계속 떠올랐다.
또 하나 감동적인 부분은 인생에 중요한 단어 중 입시나 대학, 취업이나 연봉, 재테크 돈 같은 것들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고 그냥 "얘들아 너네는 인생에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물었다면 "돈이요", "자기 명의 건물요", "인서울요" 등등을 얘기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을 향해 똑같이 달리는 상황은 뭔가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한 번쯤이라도 사유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돈이나 입시 말고도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어쩌면 학생들의 성장은 이런 사소한 시간들에 삶의 밀도를 채우는 것일 테다. 그 순간순간을 더욱 응원해 주고 나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