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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율 좋은 글쓰기

by 설영

타율 좋은 글쓰기




드로잉을 시작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저 재주가 없다는 핑계로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관심이 조금 생기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기는 것과는 좀 별개였다. 그러다가 계기가 생겼다.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드로잉 모임을 열겠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전시회도, 클래스도 아니고 드로잉 모임은 뭘까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했더니 초보자든 숙련자든 상관없이 꾸준히 그려보고 싶은 사람을 동아리 형태로 모집한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드로잉은 시작되었다.




드로잉 모임지기는 매일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그는 꽤 꾸준히 일상을 모아 오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띄운 채 꾸준히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초보자임에도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똥손’을 자책하기도 했다. 뭔가 열심히 했는데 완성작을 보면 너무 하찮고 볼품없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드로잉을 하고 있노라면 글쓰기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매일 써야 한다는 글쓰기 모임지기의 말이 겹쳐 들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점도 그러했다. Chatgpt가 글을 더 잘 써주는 것만 같은 시대에 내 글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한다는 점도, 사진이 훨씬 사물을 똑같이 담아낼 수 있음에도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몇 달 동안 모임이 이어지던 차에 모임지기는 회화작가 한 명을 섭외해 드로잉 일일 특강을 열었다. 젊은 작가는 마카 하나를 들고 설명하며 5초 만에 드로잉 작품을 그려냈다. 설명을 듣고 따라 그리다 보니 2시간은 우습게 훌쩍 지나가 있었다. 드로잉을 하는 동안 작가의 선, 터치, 멈춤 등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부분은 “여러분, 타율 좋은 그림을 그리세요. 매번 잘 그리지 않아도 돼요.”라고 덧붙인 말이었다.



야구에서 3할을 치면 타자로서는 수준급이다. 10번 타석에 들어서서 3번 정도 안타를 치면 프로에서도 인정받을 수준이라는 것이다. 삼성라이온즈의 김영웅 선수는 3년 차 프로선수임에도 24 시즌 28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삼성 내 홈런 순위로는 주장 구자욱 선수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팬들은 열광했고 내년 시즌에도 큰 기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어린 선수의 화려한 홈런기록 뒤에는 155개의 삼진아웃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삼진을 당할 수도 있지만 타석에 들어서야만 하고 헛스윙을 날릴지라도 배트를 휘둘러야 홈런을 칠 수 있다.




야구선수들이 3할을 친다면 그렇게나 열렬한 찬사를 보내면서 왜 나는 나 스스로에게 9할 이상 치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드로잉도 글쓰기도. 그렸다 하면 안타이고 글을 썼다 하면 홈런을 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회화작가가 타율 좋은 그림을 그리라고 했을 때 동공이 커지면서 마음에 부담도 빠져나가고 기분이 훨씬 가벼워졌다. 10장 그려서 1장 건져도 성공한 거라고 하는 얘기가 진심이라는 것을 야구 선수를 떠올리며 이해했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마음과, 스케치북을 펼친 화가의 다짐과, 글을 쓰고자 노트북을 펼친 작가의 심경을 나란히 놓고 상상해 본다. 결국 그 순간을 위해 배팅 연습을 하고 선 연습을 하고 매일 짤막한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매번 좋을 수는 없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10번 중에 2~3번이라도 괜찮은 그림을 그리고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희망적이다.




타율 좋은 그림과 타율 좋은 글쓰기를 위해서 목표를 높게 잡고 완벽을 추구할 게 아니라 조금씩 매일 꾸준히 해보고자 다짐해 본다. 타석에 꾸준히 들어서는 타자처럼 못 그리고 못쓰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자고 스스로 권한다.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꾸준함”이 타율을 높일 마스터키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은 괜찮은데 안 하는 것이 제일 나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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