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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영 Jan 05. 2025

딸배와 사백만 원


  2년 전, 중학교에서 나와 독서 동아리를 같이 했던 D는 그 당시 농담 섞인 진담으로 졸업 후 ‘딸배’(배달알바를 비하하는 은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월수입이 사백만 원 정도이니 책 같은 거 안 읽고 힘든 공부 할 필요 없이 바로 오토바이 사서 배달 알바를 뛰면 된다는 것이다. ‘샘은 사백만 원 이상 버느냐’는 질문에 나는 대답도 못한 채 눈만 껌뻑였다. 이런 친구들과 나는 무슨 독서 동아리 수업을 하며 내가 하고자 하는 독서 토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망이 밀려왔다. 미리 계획된 수업을 하고 동아리 활동을 마쳤으나 한동안 ‘딸배와 사백만 원’은 나를 말려 죽이는 흡습제 같았다.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읍단위 하나, 면 단위가 아홉 개로 이루어진 작은 곳이다. 이렇게 크지 않은 지역에는 학교마다 사서교사가 배치되지 않는데 학교 규모가 큰 곳에 주로 배치된다. 내가 이 지역으로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읍 단위에 있는 하나뿐인 남자 중학교였고 2년 후,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반고로 발령을 받아왔다. 남자 일반고도 하나뿐이었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대부분은 하나뿐인 그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발령받을 당시에는 그게 좋기도 했지만 싫기도 했다. 낯선 학교로 발령받아 가는 상황에서 아는 학생들이 많다는 건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독서지도하랴 생활지도하랴 서로 얼굴 붉힌 적도 많고 나 스스로 소심하게 학생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움켜쥐고 있던 터라 이제 서로 졸업하는 마당에 아름다운 이별로 두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학교로 가서 독서교육 새 출발을 하고 싶기도 했다.     

 

  이 학교에 와보니 그때 ‘딸배’를 희망한다고 했던 D는 고2가 되어있었다. 수행평가용 자료를 대출하려고 도서관에 왔을 때 내가 이름을 부르며 알은체를 하자 D는 자기 이름을 기억하냐며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몇 달 후 다시 도서관을 찾아와서는 대뜸 ‘시집’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 시집? 수행평가용이야?

 - 아니요, 그냥 좀 보려고요.


  머릿속에 딸배와 시집을 동시에 떠오르려던 찰나 재빠르게 딸배를 지워버렸다. 보통 남자 고등학생이 자발적으로 시집을 찾는 경우는 좀 드물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히 국어 수행평가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시집을 좀 보겠다는 이야기에 바로 마음이 열렸다. 그럼에도 내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샘, 저 원래 시집 읽는 거 좋아해요.”하며 고백을 해왔다.      


  나는 이병률의 시집과 황지우의 시집을 꺼내서 추천해 줬고 D는 황지우 시집을 대출했다. 도서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나는 D를 불렀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집이 있는데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오는 D에게 나는 고명재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에서 ‘목화’ 편을 읽어주었다. 

 

 - 오, 좋네요.

 - 담에 빌려주까?


  진급해 온 학생들과 함께 발령받아 생활하던 중 이런 장면들은 나에게 어떤 희망을 뿌려준다. 내가 이 학교에 같이 오지 않았더라면, 중3 때 했던 농담 섞인 진담으로만 기억했다면 나는 D를 미래를 가볍게 여기는 그저 그런 학생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흡습제가 빨아들이는 독서 지도 열정 같은 것은 이미 소진 한 채 사서교사로서의 한계만 인식하며 자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딸배와 사백만 원을 외치던 학생이 시집을 읽는 변화는 분명한 성장이었으며 그것을 보게 된 것은 교사로서 큰 기쁨이었다.   

   

  곧 신학기가 시작되면 내가 발령받았을 때 함께 입학했던 중학생 대부분이 우리 고등학교로 온다. 사람의 탈은 쓴 반인반수가 아닐까 의심마저 들었던 그 천방지축 중학생들이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3월의 입학식이 매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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