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철희 Aug 28. 2024

왼발과 오른발을 규칙적으로 움직일 것

다닐 행, 항렬 항(行)

인류 문명은 이 글자 덕분에 이룩됐고

인류는 이 글자 덕분에 번성하게 됐다고 주장해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글자가 있다.

“행위(行爲),” “행동(行動)” 등에 들어있는

다닐 행()”이 바로 그 글자다.

내 주장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行”은 큰길이 교차하는 사거리를 그린 글자다.

그래서 “길, 도로”라는 뜻도 있고,

사람들이 그런 곳을 다니는 행위에서 비롯된 “가다”라는 뜻도 있다.


“行”은 “왼발로 걷는 모양”을 뜻하는 조금 걸을 척()”

“오른발로 걷는 모양”을 뜻하는 자축거릴 촉()”이 합쳐진 글자다.

따라서 “行”은

사거리처럼 넓은 공간에서 왼발을 내디딘 다음에 오른발을 내딛는 식의

규칙적인 몸놀림을 통해 이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글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성이다.

우리의 안정적인 이동은

왼발과 오른발을 규칙적으로 움직여야만 가능하다.

왼발과 오른발을 내딛는 순서가 제멋대일 경우,

그에 따른 이동은 경련이나 발작에 따른 이동이지

우리의 의식에 따른 이동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行”은 “규칙성을 유추할 수 있는 움직임”을 가리키는 글자이지

무작위적인 움직임을 가리키는 글자가 아니다.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행성(行星)”이라는 단어에

이런 뜻이 잘 반영돼 있다.

“행성”은 “나름의 규칙에 따라 독립적인 궤도를 도는 별”을 가리킨다.

밤하늘의 별이 “행성”이 되려면

그 별이 그간 그려온 궤적을 바탕으로 미래의 궤적을 예상할 수 있는 별이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원활한 작동에 반드시 필요한 금융기관인 은행(銀行)”

“銀이 규칙에 따라 드나드는 곳”을 가리킨다.

그 기관을 들락거리는 귀금속이 값비싼 金이 아니라

그보다는 저렴한 銀인 이유는

명(明)·청(淸) 시기 중국의 경제시스템이 은 본위제였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긴자(銀座)는

에도시대에 은화(銀貨) 제조소가 그곳에 있던 것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그 시절에는 긴자에서 제조된 은화가 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흘러들고,

그 은화가 다시 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 가는 식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경제시스템이 활발하게 돌아갔었다.


요즘에는 회사 이름을 영어로 짓는 경우가 많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 이름은 한자 단어로 짓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양행”이라는 식으로

회사 이름에 양행(洋行)”이 들어있는 회사가 많았다.

“양행(洋行)”은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이라는 뜻이다.

“서양의 물건을 규칙적으로 거래하는 곳”인 것이다.

“양행”이라는 단어를 사명에 사용한 회사들 중에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회사는

아마도 유명한 브랜드 티슈를 판매하는 동시에

나무를 심는 사회적 활동으로 잘 알려진 “유한양행”일 것이다.


역시 요즘에는 “엔터테인먼트”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게 일반적인

흥행(興行)”이라는 단어가 있다.

“行”에 담긴 뜻에 따르면 이름이 “○○흥행”인 회사나 흥행업에 종사하는 기업은

대중과 소비자에게 “興”을 규칙적으로 제공하는 곳이어야 하는데...

“흥행은 귀신도 모른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엔터테인먼트업계라는 곳이

연예인이나 작품의 성패를 예측하는 게 지독히도 어려운 곳이라는 걸 감안하면

“興”의 규칙성을 강조하는 “興行”이라는 단어는 조금 잘못된 선택인 듯하다.


그런데 “行”이 규칙성을 가진 움직임을 가리키는 글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는 따로 있다.

바로 동양철학의 밑바탕에 깔린 사상을 가리키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라는 단어이다.

五行은 木·火·土·金·水 다섯 가지 기운이

“나름의 규칙”에 따라 서로를 생(生)하고 극(克)하면서

만물을 변화시키고 생동시킨다고 보는 관점이다.


“行”을 항렬 항으로 읽을 때도

“규칙적인 움직임”이라는 의미는 그대로 담겨있다.

“항렬”은 같은 혈족의 직계에서 갈라져 나간 계통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형제자매 관계는 같은 항렬로, 같은 돌림자를 써서 관계를 드러낸다.


참고로, 필자의 돌림자는 “빛날 희(熙)”자이고

아랫대의 돌림자는 “터 기(基)”자다.

항렬자는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등으로 이어지는

음양오행의 상생관계에 따라 배정된다.

필자와 필자의 동기들은 “火(灬)”가 들어있는 돌림자를 쓰므로,

필자의 아랫대는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에 따라

“土”가 들어있는 돌림자를 쓰게 되고,

그 아랫대는 “토생금(土生金)”의 원리에 따라

“金”이 들어간 돌림자를 쓰게 되는 식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스파이, 위험하고 살벌하며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직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