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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Aug 28. 2024

스파이, 위험하고 살벌하며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직업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파이”는

영화 때문에 무척 심한 오해를 받은 직업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오해의 근원에는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스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유명한 캐릭터들,

그러니까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이 있을 것이다.

살인면허를 뜻하는 암호명 “007”로 유명한 제임스 본드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 무시무시한 살인병기 제이슨 본은

영화가 탄생시킨 유명한 스파이들이지만,

대중이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겪는

진짜 애환과 고충을 인지하거나

실감하지 못하게 만드는 캐릭터들이기도 하다.



“스파이”는

정말로 위험하고 살벌하며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직업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윤종빈 감독의 <공작>에서

스파이가 되라는 제의를 받은 황정민이

패가망신을 하는 것으로 스파이 변신을 시작하는 것을

떠올리면 내 주장이 납득될 것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커>)도

“스파이”가 정말로 위험하고 고달픈 직업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3년,

부다페스트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는

접선 상대를 비롯한 주위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도망가려 하지만 결국 총에 맞고 쓰러진다.



그런데 <팅커>가 제시하는

“스파이 된 자가 겪게 되는 고달픔”은

총에 맞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파이의 제일 큰 고충은 스파이가 된 순간

온 세상이 “그야말로 믿을 놈 하나 없는”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스파이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의심해야 마땅한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가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위험해진다.

그렇기에 노천카페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는 의심스럽다.

자신을 힐끔거리는 웨이터는 의심스럽다.

이렇게 스파이는 세상만사를 다 의심해야 한다.

은퇴했다고 의심을 그쳐서는 안 된다.

<팅커>의 주인공 스마일리(게리 올드만)가 보여주듯

은퇴한 뒤에도 누군가가 집에 침입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쭉 품고 살아야 한다.



의심의 대상은 점점 더 넓어지다

스파이 자신이 속한 정보기관으로까지 확장된다.

실제로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이던

존 르카레의 소설이 원작인 <팅커>는

조직(일명 “서커스”) 내에 잠입한 두더지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스파이들이 서로에게 품은 의심과

그 의심을 빚어낸 여러 사건을 그려낸다.

그래서 <팅커>에는

제임스 본드처럼 명차를 몰고 기발한 장비를 사용하며

어디를 가건 미녀들을 유혹하거나 미녀들의 유혹을 받는

스파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이슨 본처럼 테이블에 놓인 잡지책을 말아

치명적인 무기로 사용하는(나는 이 설정을 정말로 좋아한다)

호신술의 달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냉전”이라는 기기묘묘한 게임에 투입돼

모든 것을 의심하는 초조한 삶을 살던 끝에

고독한 운명을 맞이하는 “스파이” 직업 종사자들이 등장할 뿐이다.



<팅커>는 스파이들이 처한 딜레마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큰 딜레마 중 하나는 자신을,

나아가 적을 정확하게 평가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게

수천 년간 병법의 절대적 진리 대우를 받는 것은

나를 제대로 아는 것도, 적을 제대로 아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스파이는 상대를 괴물로 여기는 한편,

그 괴물 같은 상대가 자신을 괴물 같은 존재로 보게끔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팅커>의 MI6는

그들 소속의 스파이 007이 스크린에서 맹활약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CIA에 무시당하고 KGB에 농락당하는 신세다.

“서커스” 구성원들은

KGB 소속의 “카를라”를 괴물로 여기며 무서워하는 반면,

그의 앞에서는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왜소해진다.



물론 카를라는 막강하다.

스마일리의 약점을 간파하고는

두더지를 조종해 그의 개인적인 삶에 큰 아픔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카를라는 실제로도 그렇게도 막강한 존재일까?

과거 카를라를 만나 전향을 설득한 적이 있던 스마일리도 알다시피

카를라조차 그가 속한 체제 앞에서는

체제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일개 부품일 뿐이다.

언제든 교체할 수 있지만

당장은 쓸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교체될 리가 없는 부품.

그런데도 “서커스” 전체는 카를라를 과대평가하며 무서워한다.

그래서 내부에 카를라의 “두더지”가 반드시 침투해 있을 거라는 판단 때문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해 행위를 하기까지 한다.



<팅커>는 임무를 수행하다 사랑에 빠진 스파이도,

일에 열중하다 사랑을 잃은 스파이도 보여준다.

<팅커>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서커스” 요원들이 참석한 파티에

레닌으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고 소련 국가가 울려 퍼지자

모두들 일어나 적성국의 국가를 열심히 합창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적과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어느 틈엔가 자신들을 적과 동일시하게 된 사람들이다.

스파이를 그만둔 뒤로도

“현실 세계”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씁쓸한가?

스파이로 활동 중일 때는 아내와 애인에게 버림받고

은퇴한 뒤에는 술에 의지해 외로움을 달래거나

외진 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괴로운 현실을 잊으려 애쓰는 모습은?

비밀리에 두더지 색출 작전을 벌인

스마일리와 피터(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결국 두더지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이자 완벽한 엔딩이 등장한다.

홀리오 이글레시아스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La Mer”의 뮤직비디오라고 말해도 무방한 장면이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는

“서커스”의 과거와 현재를 깔끔하게 이어준다.

송년파티에 참석해 1년간 쌓인 스트레스를

음주가무로 해소하는 요원들은

노래가 흐르는 동안 이런저런 감정이 실린 눈빛을 주고받는다.

노래가 조금 더 흐르면

과거와 조직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들의 현재 모습이 등장한다.

작전 실패로 지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괴로움에 시달리는 스파이는

조국을 배신한 친구이자 연인을 처단하러 간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방아쇠를 당기면,

“추한 모습의 조국보다 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체제를 택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놓은 배신자는 피를 눈물처럼 흘리며 쓰러진다.

사랑했던 여인이 냉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스파이는

그 여인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이제 정말로 조직에서 쓸모가 없어진 스파이는

다시 외로운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조직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최후의 승자들이 웃음을 교환하고

그들이 벌인 활약에 대한 합당한 대우라 할 자리에 앉아 웃음을 지으면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진다.

스파이를 그 위험하고 고달픈 직업에 기꺼이 종사하게 만드는 것은

마지막에 받게 될 그런 환호성과 박수갈채에 대한 기대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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