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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철희 Sep 11. 2024

순식간, 찰나, 잠깐, 그리고 영겁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흐른 뒤라는 걸 깨닫기 일쑤다.

아날로그시계의 초침은 1초에 한 번씩 똑딱거리고

디지털시계의 숫자는 1초에 한 번씩 바뀌는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우리가 정신이 있건 없건

자기들 소임대로 꼬박꼬박 시간을 기록하는

아날로그시계도 디지털시계도 없던 시절에

인간이 시계를 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바탕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심장 박동, 맥박 등이 시간 측정에 쓰였을 텐데,

지금 우리가 쓰는 단어에도 남아있는 또 다른 움직임이

눈의 깜짝거림과 호흡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들을 가리키는 글자인

(눈 깜짝일 순)”과 (숨 쉴 식)”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가 순식간(瞬息間)”이다.


“순식간”은 “눈을 한 번 깜짝하거나 숨을 한 번 쉴 만한 아주 짧은 동안”을 가리킨다.

생각해 보면,

나는 평소에 내가 눈을 깜박이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다).

자려고 눈을 감거나 의식적으로 눈을 평소보다 오래 감고 있는 게 아닌 한,

일상생활 중에 나는 눈을 깜짝이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쭉 세상을 보고 있다.

세상을 보는 중에도 분명히 눈을 깜박이고 있겠지만,

“0.1~0.15초 사이에 이뤄지는 게 보통이라는

눈 깜빡임에 의해 시야가 잠깐씩 가려지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내가 “눈 깜짝할 새에” 눈을 깜짝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겠지?


숨을 쉬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평소에는 내가 얼마나 자주 숨을 쉬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그렇게 내가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이) 의식하지 않으면서

짧게, 그리고 줄기차게 행하는 두 가지 행동을 합친 단어가 “순식간”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이 두 행동 중에서 더 짧게 이뤄지는 행동으로 본 것은

“눈 깜짝임”이었던 듯하다.

“순식간”에서 “식”을 뺀 순간(瞬間)”이라는 단어도

“순식간” 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걸 보면 말이다.

“瞬”은 역시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하는,

“눈을 한 번 깜짝이는 시간”을 가리키는 일순(一瞬)” 같은 단어에도 사용된다.


불교 용어인 찰나(刹那)”

“아주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다.

“찰나”가 가리키는 시간은 75분의 1초(0.013초)다.

앞서 소개한 “눈 깜짝이는 시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다.

“刹那”에 쓰인 한자들은 불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한자들로 구성돼 있기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매우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 또 다른 단어로

잠시(暫時)”와 잠간(暫間)”이 있다.

“잠간”의 경우는 “간”이 된소리인 “깐”으로 변하면서

잠깐이라는 발음으로 사용된다.


“잠시”와 “잠깐”은 (잠시 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어들이다.

“暫”은 “(시간이) 짧다”는 뜻의 글자다.

글자 윗부분은 “車(수레 거)”와 “斤(도끼 근)”이 결합한 것으로

“베다”라는 뜻이 있는데,

실제로는 사극에 나오는 “거열처사(車裂處死),”

즉 죄인의 사지를 수레 다섯 대에 묶어 찢어 죽이던 극형을 가리킨다.

거기에 시간을 뜻하는 “日”을 아래에 붙여

“고통스럽지만 매우 짧은 순간에 목숨을 잃게 만든다”는 뜻이 파생된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앞으로 “잠깐”이나 “잠시”라는 말을 할 때가 있더라도

그 단어의 어원은 굳이 떠올리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성싶다.


지금까지 “짧은 시간”에 대해 알아봤으니,

이번에는 그 짧은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뤄진 “긴 시간”에 대해,

그것도 “무지하게 긴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영겁(永劫)”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이 그 단어다.


“劫”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시간 단위인 “칼파”를 한자로 음차 한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1겁은 1,000년에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로 큰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에 바위가 닳아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불교에서는 전생에 쌓은 500겁의 인연으로 옷깃을 스칠 수 있으며,

1,000겁의 인연이 쌓이면 한 나라에 태어나고,

2,000겁의 인연은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게 된다는 등의 설명을 통해

우리가 인생을 살며 맺는 갖가지 관계가

얼마만큼의 인연이 쌓인 결과물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1겁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계산해 본 유튜버가 있는데,

계산 결과는 2547해

(숫자 단위에서 “억(億)” 다음이 “조,” “조(兆)” 다음이 “경,”

“경(京)” 다음이 “해(垓)”다) 년이라고 한다.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라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무지하게 긴 시간인 건 분명하다.


이 글을 쓴 나와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사이의 인연은

얼마나 오랜 기간의 인연이 쌓이고 쌓인 결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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