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1.
제천 봉양읍을 지나는 제원로 어디쯤에 높이 3.8미터 고가 밑을 지나는 지점이 있다. 고가 위는 철길로 예전에 기차가 다녔다. 부모님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어제 일처럼 옛일 하나가 되살아난다고 하신다.
지금도 더러 있지만 아버지 젊었을 때 주변으로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다. 동네마다 망루 같은 담배건조실이 드물지 않게 우뚝하였다. 그날도 밭에서 베어낸 담뱃잎을 가득 싣고 건조실로 옮기기 위해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함께 작업한 동네 이웃 여럿 중 몇은 트럭에 올라타고 몇은 걸어가는데, 한 사람이 높다랗게 쌓아 올린 담뱃잎 덮은 포장 안으로 장난스럽게 들어갔다. 그런 채로 트럭이 달렸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얼추 왔을까 싶어 포장을 들추고 고개 내민 곳이 그 고가 밑이었다. 일어서며 고가 난간과 부딪쳐 그대로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아버지 말을 옮기면 뭐가 툭 떨어졌고 내려서 보니 누구 아버지인 그 사람이었다고.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혼자만 짐 위에, 그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포장 안에, 그 넓은 허공을 두고, 다리 난간을 지나는 그 순간에 일어섰으니 우연치고 기막히지 않으냐며 매번 어제 일처럼 떠올리신다. 당시 기억이 강렬하게 아버지 머릿속에 새겨진 듯하다.
죽음이란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고도 얘기한다. 그런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어느 때, 밖을 떠도는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고 맞서 싸우다 지는 날이 있겠다. 그 순간 나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 영원히 밖이 되는 거겠다.
2.
남자 어르신 한 분이 문화원을 방문하였다. 추운 겨울날, 예의 갖춘 말끔한 정장차림이다. 일층 전시관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어르신들이 근무하는 걸 알고 찾아온 듯하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일할 수 있냐고 묻는다.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 그래도 직접 찾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조언이나 아니면 오래된 관념에라도 떠밀렸을까. 옛날 같으면 인생을 되돌아보며 휴식기에 들어야 할 노년에 일을 해보겠다고 면접이라도 보는 심정으로 걸음 했을 모습이다. 노인일자리 사업을 제공하는 노인종합복지관을 안내했다. 역사자료전시관 근무도 노인 일자리 참여 사업이다.
이렇게 될지 아무도 모른 체 우리는 늙어 병든 몸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맞이한다. 아차, 싶을 정도로 되돌릴 수 없이 세월을 소비한 듯 허무해지고 무위(無爲)에 빠진다. 노인의 4고(苦)인 아프고, 고독하고, 할 일 없고, 수입 없는 오늘이 문 앞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어르신 뒷모습에 마음이 너무 이상했다.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여태까지 나는 계속해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거의 없다. 오로지 어서 정년이 되어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뿐이다. 물론 주어진 일이 있으니 감사하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한다.
개념으로서의 ‘일’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활동이며, 동사 ‘일하다’는 무엇을 이루려고 몸이나 정신을 쓰는 것이니 커다란 범주의 일이란 모든 움직임을 말할 것이다. 밥을 먹으려고, 어디를 가려고, 씻으려고 등등. 위 어르신의 경우는 돈을 벌기 위해서, 무료함을 잊으려고, 존재감을 높이려고…… 무엇이 제일 절박할까 못내 궁금하다.
3.
엄마 전화로 잠에서 빠져나왔다. 더 일찍 깨긴 했으나 그냥 누운 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붙잡혀 있었다. 잠긴 목소리 때문에 엄마의 걱정을 들었다. 새해 아침부터 밥을 못 찾아먹고 있는 딸을 나무라신다. 하루 세끼를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방금 전까지 허우적대던 무의식(꿈)을 떠올렸다. 불쾌했다. 현실보다 더 불편한 무의식의 세계다. 나의 오늘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고요한데 오히려 무의식이 옛날의 고단함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 깊은 곳의 두려움과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꿈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무의식까지 치유되기에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아무튼 꿈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미사 때에 내가 잡은 말씀표가 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쾌한 말은 화를 돋운다.’ 명심하고 실천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 속의 오래 묵은 패배의식이 반사적으로 냉소적인 소리로 반응하는 걸 느낀다. 부드러운 말이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을 스스로 심심찮게 경험하는데도 곧잘 순간을 놓친다. 올해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대답을 실천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