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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버yeong May 31. 2024

그 마음의 끝은 어디일까

가족

“야야, 느네 김장배추 내가 심어주리?”

“음... 그럼 오빠, 나중에 거기 먼데까지 실으러 가...야...는데?”

“내가 실어다 줄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그럼, 좋아! 심어줘.”

  여름날의 찌는 듯한 더위가 수그러들 즈음이면, 옥수수가 너풀거리는 잎사귀 뒤로 업고 있던 통통하고 노란 금쪽이를 사람에게 떼어 주는 시기이다. 그렇게 부스럭 한 줌에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키 작은 배추모종이 태양을 향해 춤을 추며 자란다.     


   달력이 10월로 넘어가면 금세 뒤 따라오는 근심 한 가지 김장 담그기이다. 삼십 년 넘게 해마다 겪는 겨우살이건만 ‘얼마만큼 분주함해야 또 마무리되려나.’하는 마음의 준비도 한 채비다. 드디어 오늘, 오빠가 깔끔하게 다듬어 싣고 온 배추는 초록빛 갸름한 얼굴이 얼마나 예쁘고 싱싱해 보였는지 모른다. 오빠가 오로지 여동생을 위해 여름 내내 물까지 줘 가며 길러준 정성의 먹거리라서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내려놓으며 배추를 만졌을 때 줄기가 ‘아사삭’ 꺾이는 소리는 겨우내 식구건강을 지켜 줄 소리였다.      


   두 얼굴로 살아온 나는 올해도 어설픈 솜씨로 김장을 하고자 한다. 친정에서는 살림살이하는 것엔 평생 서투른 동생이고, 시가에서는 새우젓도 담가 먹는 야무진 며느리이다. 아직껏 나도 내가 헛갈린다. 이런 처제인지라 형부는 기꺼이 단독주택 넓은 뒤뜰을 내어 줬다. 배추는 속이 단단하게 들어앉아서 자루 굵은 칼로 내리눌러도 쉽게 들어가질 않았다. 나는 끙~끙!....... 쉽지 않은 칼질. 힘센 조카가 옆에 있었지만 이건 당연히 내가 할 일이었다. 손목이 많이 아픈 언니보다는 내가 낫다며 빼앗은 칼로 포기 가르기를 열심히 해 내고 있었다. 정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나름 집중하며 이어갔다.      


   반쪽짜리 배추가 쌓여 갈 무렵, 허연 머리에 눈치 빠른 장조카가 내 모습을 보다 못해 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계속 찢어져 나가는 배추 아깝지요?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이 참에 이모 잘 가르쳐 드리세요~.” 난 내가 뭘 잘못하는지 모르던 중에 고개를 들어보니 두 모자가 눈을 마주친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힘의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배추 안쪽이 떨어져 나간다고 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다시 배워 끝까지 했다. 평소 알뜰한 언니는 손과 팔다리 모두 정형외과와 한의원 침에 의지하는 지경이라 동생의 어설픔을 바라만 봐야 하는 이 답답한 미소를 어쩌면 좋을까나!         


   김장은 정말 힘들다. 그래서 먼 곳에서 직장 생활하는 딸, 아들도 불러 내렸다. 그런데 사위도 온다고 하고, 예상에 없던 예비며느리도 참여하겠다는 소식을 임박하게 받았다. 내 집에서 하는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 언니와 나는 이미  김장 날은 여자들이 너무 힘드니 점심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외식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전날 밤 잠자리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그래도 현장에 먹거리가 한 가지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형부와 오빠, 더구나 남양주에서 기차 타고 도와주러 오는 막내 여동생까지 걸려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연거푸 사흘째 출근, 김장 버무리는 날이 왔다. 출발 직전에 아들을 깨워 계획대로 단골정육점에서 편육거리를 넉넉히 사 오라고 이르고 서둘러 언니에로 갔다. 아들은 우리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정육점을 찾느라 애를 썼다. 그래서 배추를 씻는 동안 나와 두어 번의 전화통화를 하게 됐다. 이때 뜰 안팎을 들락날락하며 그 소리를 얼핏 들은 언니는 

  “정육점? 지금 고기 삶고 있는 중이야~!”

  “....... 뭐, 뭐, 뭐라고?”

  그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뒤퉁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품 넓은 조카는 제 집에 사촌 동생이 둘씩이나 오니 맛있게 먹이고 싶다며 나가서 삼겹살을 한 보따리 사 왔더라며 언니가 말했다. 김장 주인이며 이모인 내가 할 일을 손아래 조카가 앞서서 했다. 아무리 가까운 피붙이 일이라 해도 이건 경우가 아니었다. 조카사위와 며느리까지 온다는 걸 알면 언니는 약속과 달리 손수 음식을 장만할 게 뻔해서 아예 감췄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나는 언니의 수고로움만 생각했지 사람을 맞이하는 쪽의 입장은 눈꼽만큼도 헤아리지 못했다. ‘고양이 쥐 생각’하며 뒤늦게 건져 올린 짧은 생각도 속 깊은 조카 앞에선 접시물에 불과했다. 많이 부끄러웠다.      


  절인 배추에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모두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손 빠른 동생이 가지런히 썰어 낸 편육과 생굴무침 한 쌈의 맛은 그만이었다. 열 명 넘게 모여 앉아 주거니 받거니 먹는 음식은 말 그대로 행복의 맛이었다. 언제나 우리 ‘네 식구’ 일 것 같았는데 어느새 여섯 명이 되어 이모네 집에서 북적거리기에 이르렀다. 일하는 자리인데도 기꺼이 온 새 사위와 결혼을 앞둔 며느리가 기특하기만 하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칭찬이다. 역시 세상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언니네다.     


  긴 새참 시간을 마치고 나니 손마다 고무장갑을 끼고 나섰다. 날씨는 흐렸어도 모두가 함께한 올 김장은 웃음양념을 더 얹었다. 나보다 더 어설픈 청춘들의 손은 노란 배추를 연신 빨간 옷으로 갈아입혔다. 꼬박 3일을 준비한 김장이 한 시간 만에 김치통에 들어앉았다. 요 정도의 수고로움으로 끝나다니. 언니네서 할 만하네! 허리 통증도 따라서 잦아드는 것 같았다. 언니네 온 식구를 내내 힘들게 해서 미안했다.      


  “언니! 으음....... 가을이라 언니 쓸쓸해할까 봐 내가 우리 김장 여기서 한 거다!”

  “그래. 이렇게 모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고맙다!”

나는 미안함을 감추기 위해 혓바닥으로 위장을 했다. 형부네 식구들과 오빠, 그리고 막내 여동생까지 그 마음의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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