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요즘 궁금한 나는 누구인가? #3
김여사는 1940년 늦은 가을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나 보니 방앗간과 정미소를 하는 사장님의 첫 딸이었죠. 황해도 평산에 객주도 하나 있어서 김여사의 집안에는 늘 손님이 들락거렸습니다. 손님상과 일꾼들 찬으로 매달 콩 한 가마니 반씩 들어갔는데, 쪼꼬만 하니 간장종지만했던 김여사는 너른 마당에 쪼그려 앉아 콩자반 조린 걸 주워 먹곤 했습니다. 맛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쪼글쪼글하고 짭조름한 콩자반 골라 먹는 게 재미있었답니다.
먹고살만한 집 4대 독자인 할아버지는 손에 물 한 방울을 안 묻히고 귀하디 귀하게 자랐습니다. 키는 작았지만 (크흠..) 포마드 기름을 발라 머리를 반질반질하게 넘기고 카라가 넓은 양복을 해 입은 할아버지는 돈 많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한량들이 늘 그렇듯, 할머니를 놔두고 색시들을 여럿 갈아 치웠습니다. 할아버지와 정이 없던 할머니는 기차 소리만 나면 집에 가고 싶다며 울었고, 그때마다 김여사는 이유도 모른 체 옆에서 같이 울었습니다.
김여사가 예닐곱이나 되었을 무렵, 한눈에 보기에도 고운 양과자점 색시가 신기한 빵이며 과자를 한 꾸러미 안겨주며 예쁘다 귀엽다 해주었습니다. 앙꼬가 잔뜩 들어간 과자를 선물 받은 김여사는 얼굴이 희고 자태가 고운 색시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자기도 저렇게 예쁘게 컸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양과자점 색시와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한동안 무슨 얘기를 하던 할아버지는 김여사와 과자 꾸러미를 안고 집으로 왔는데, 어쩐 일인지 할머니는 전에 없이 무서운 얼굴로 김여사를 다그쳤습니다. 다시는 그 양과자집에 가면 안 된다 다짐을 받았는데, 어린 김여사는 그림처럼 예쁜 색시와 알록달록 신기한 과자들이 아쉬워 하루종일 뾰루퉁 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은 모두 양과자집 얘기로 혀를 끌끌 차며, 매번 이렇게 가게 하나씩 차려주면 재산 다 날린다고 뭐라 하다가도, 김여사만 얼진하면 모른 체했습니다. 그러나 김여사는 그저 양과자가 좋기만 했습니다.
김여사가 여덟 살인가 되던 해 4월 초하룻날. 할아버지는 깡패들에게 맞아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코에서 자꾸 순두부 같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와 일꾼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업고 뛰어갔지만,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본 채 그 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꾼들은 여자 때문이라고 했고, 어른들은 이북 황해도에 있는 객주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6.25가 터지기 1년쯤 전이었습니다.
나라에 난리가 나자 김여사는 사람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신작로가 사람으로 새하얬습니다. 김여사는 자기도 따라가 보고 싶었는데, 어른들이 따라가면 집 잃어버린다고 단단히 혼을 내서, 머리만 빼꼼히 내놓고 사람 구경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김여사도 드디어 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나서게 되었죠. 예쁜 상고 머리에 제일 좋은 인견 저고리로 단장하고 조치원이라는 곳으로 갔는데, 거기 사람들은 죄다 퉁명스럽고 무뚝뚝했습니다. 예쁨 받고 자라던 김여사는 조치원이 싫어서 몇 밤을 자야 서울 큰 집에 가냐고 보채곤 했습니다.
조치원으로 피난을 갔다 온 뒤, 김여사의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이제 열두 살 남짓한 김여사가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다짜고짜 옛날 일꾼 아저씨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집을 뒤지며 화를 내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쓰던 은수저 여러 벌과 이불 한 채를 찾아냈는데, 이불을 숨긴다고 이불 위에 솥뚜껑을 덮고 삿나무로 덮어 놓았답니다. 김여사는 그게 너무 우스웠습니다. 저렇게 숨기면 다 보이는데, 일꾼 아저씨가 정말 급했나 봅니다.
이제 비행기도 안 날아다니고, 우르르 몰려다니던 사람들도 없어지자, 소학교에서는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김여사는 3학년을 배울 차례였으나, 갑자기 5학년으로 올리더니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다 졸업시켜 버렸습니다. 3년 동안 수업을 못해서 밀린 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김여사는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까지는 갈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이제 공부는 끝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어린 김여사는 그저 학교 공부가 끝난 거라고 생각해 서러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김여사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시기가 끝난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글 쓰지 말라던데..
새벽에 일어나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치 본 것처럼 써 봅니다.
나중에 오글거려서 후회할 것 같긴 한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