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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어만세 Jun 26. 2024

이런데 막 들어오시면 안 돼요..

제가.. 여기서 일하는 데요..

흠. 저는 솔직히 말해서 '잘생겼다'와는 거리가 좀 멉니다. 원빈, 현빈, 우빈 등 각종 "빈"류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굳이 비슷한 빈을 꼽자면 Mr. 빈 정도일 겁니다. 친구들은 지구 어딘가에는 너 같은 외모가 먹어주는 지역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제 생각에 지구는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게다가 체형도 건전하지 못해서 종종 안 받아도 될 오해를 받곤 하죠. 5백 년 전 몽골에서 태어났으면 딱 장군감이라는데, 현실은 IT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구요.


어허. 5백 년 전이었으면
늬들은 나랑 밥도 못 먹었어. 어딜 지금..

학교에 강의를 나갈 때였습니다. 회사에 일이 있어서 본강을 빼먹고 주말에 보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본강 시간에는 정장을 하고 다니지만, 보강이라 대충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갔습니다. 토요일이잖아요. 당시에는 프로젝터를 사용했는데, 이게 예열 시간이 좀 필요해서 강의 20분 전에는 켜놔야 했습니다. 수위실에 들려서 강의실 좀 열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관리인 아저씨가 위아래로 훑어보십니다..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네?"

"이런데 막 들어오시면 안 돼요."


저는... 이런 일에 익숙합니다. 종종 겪거든요.

얼른 문 열려면 공손하게 다시 부탁드려야 할지, 센 척해야 할지 0.1초 안에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 2년 전부터 강의하는 외래교수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는 교수 나부랭이 말투로 툭 던집니다. 말이 좋아 외래교수고, 사실 시간 강사가 맞는 표현이죠. 그리고 시간 강사는 뭐.. 개뿔도 없습니다. 회사에는 눈치 보이고, 시간은 엄청 뺏기고, 돈은 안 되는 일입니다. 어디 가서 센 척 비슷한 것도 해 볼 수 없는 직종이죠. 다행히 센 척이 먹혀서 바로 문이 열렸습니다.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너무 막 입고 나왔나 싶기도 하고..




IT 버블이 한참이던 시절, 회사 앞에 스타벅스가 생겼습니다. 점심 먹고 들어가는 길에 커피를 한 잔 받으러 갔는데, 점원분이 주문을 헤맵니다. 대충 봐도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입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하시라고, 농담도 좀 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하며 기다리는데 컵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코카콜라 컵이나 스타벅스 컵을 하나씩 모았어요. 지금 보면 다 예쁜 쓰레기인데.


"쟤는 얼마예요?"

"아, 가격 봐 드릴까요?"

"아니에요. 비싸 보이네요. 담에 살게요."

"네. 그런데 손님은 이런 데 처음이신가 봐요."


응? 이런 데? 이런 데 어디? 스타벅스?

얼굴 표정은 너무 해맑습니다. 클레임 안 걸고 기다려줘서 너무 고맙다는 뉘앙스입니다. '너두 이런 데 처음이구나, 나도 이런 데 처음이야. 반갑다. 칭구야..'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아..


그쵸. 강남역 한복판에서 반바지에 쓰레빠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잘못한 거지. ㅎㅎ




대학교 다닐 때는 종종 얼굴을 이용해 신입생들한테 그럴듯한 장난질을 치곤 했습니다. 강원도 민통선 근처에 살았는데, 농어촌 특별 전형으로 들어왔다고 하면 다 믿었어요.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전기가 끊어져서, 집에서 발전기를 돌려서 테레비를 보곤 했다.. 너 혹시 소한테 받혀 본 적 있냐? 난 붕 떠서 몇 미터 날아가 봤다... 이런 얘기들 말이죠. 3학년 때인가, 여자 후배한테 급작스럽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강원도에 큰 비가 내렸다는데 오빠네 집 괜찮아?"

"우리 집? 서울인데?"

"아니, 오빠 태어난 집.."

"나? 국립의료원에서 태어났는데?"

"아니, 오빠가 살던 고향 집 말이야!!"


어머니 고향은 마포, 아버지 고향은 충무로. 순도 백퍼 서울 태생. 내 말투가 서울 사투리라는 걸 대학교 가서 깨달은, 나름 건물주 아들. 너... 진짜로, 진심으로, 믿었구나. 내가 강원도의 정기를 받았다는 얘기를... 그래. 내가 사실 감자를 좋아하긴 하는데, 정확하게는 맥도날드 감튀를 좋아해.. 감튀에 케찹을 1:1 비율로 찍은 거.




요즘에도 출근길에 전단지를 종종 받습니다. 그린 컴퓨터 아트 학원에서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시라며... 제가 그거 15년째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려다가, 그래도 도나 기에 관심 있는 분들보다야 전단지가 낫지 싶어 조용히 한 장 받습니다. 얼른 나눠 주시고 들어가시라며, 속으로 중얼거려 봅니다.



젠장. 몽골에서 태어났어야 했다.
말 타고 다니며 활 쏘는데
최적화된 체형이라는데..


팔은 길고, 다리는 짧고, 코어 그뉵은 왤케 많아..



죽은 척하다가 벌떡 일어나 활 쏘는 거, 나 그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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