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요즘 궁금한 나는 누구인가. #1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 후암동에는 군경합동수사본부라는 데가 있었습니다. 일단 이름만 들어도 확 쫄리는데, 진짜로 가보면 더 쫄립니다. 숨이 턱 막히는 작은 방에는 어디서 저런 소품을 구했나 싶은 백열 삿갓등이 달려 있고, 은색 테두리를 두른 옥색 철제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있습니다. 아주 주차장에 가면 시발택시도 하나 있을 분위기입니다. 주눅이 확 들어서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데, 수사관이 책상에 서류를 탕! 던지며 대뜸 반말부터 날립니다..(응?) 왜.. 초면에 반말을..
“너 이 신청서 누구한테 갔다 줬어? “
“어.. 9번 창구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요.. “
“그러니까 창구 누구? 받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
“번호표 뽑고 직원한테 냈는데요. “
“허! 야. 너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
다시 책상을 쾅 내려치는데, 쫄리는 와중에도
마음 한편에서 지랄 맞은 성격이 욱 합니다.
30년 전쯤.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 아들이 저체중으로 면제를 받는 기적을 일으키며, 그즈음 면제 군 판정을 받은 사람들 대상으로 일제 재조사를 했습니다. 저도 20살 때쯤 디스크가 나가면서 현역에서 면제로 넘어갔는데, 그걸 다시 조사해야겠으니 후암동에 있는 군경합동수사본부로 오라는 것이었죠..
근데 이게 말이 좋아 조사지, 너무 얼토당토않은 걸 물어보니까 짜증이 확 밀려옵니다. 세상에 서류받은 창구 직원 이름 같은 걸 어떻게 알아요..
“저.. 저기요. 직원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요.”
“재검 신청서를 냈는데 직원 이름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이거 접수한 날은 며칠이야?”
“어.. 아마 몇 월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몇 월 며칠이잖아! 똑바로 얘기 안 해?”
‘근데.. 이 냥반이.. 알면 왜 물어봐?‘
쫄리는 건 쫄리는거고, 쓰잘데기 없는 질문을 계속하니까 슬슬 부글부글 올라옵니다..
“세상에 누가 서류 접수한 날 같은 걸 기억해요? 그리고 말 나온 김에 말인데요. 은행 가서 돈 낼 때 창구 직원 이름 보고 내세요? 그리고 거기 서류들 다 있으면 접수 날짜 찍혀 있을 거 아니에요. 왜 물어봐요?”
네. 지금이었으면 조용조용 좋게 좋게 말했을 텐데, 그때는 스무 살 언저리였습니다..
“넌 잠깐 나가. 야 밖에 보호자 들어오라 그래! “
“아, 어머니는 또 왜요? 저랑 얘기해요. “
“넌 나가라고 이 새끼야. “
“아! 왜 욕을 하고 그래요!”
김여사와 바통 터치. 디스크 경력 30년. 허리에 철심을 박는 뒤, 봉합이 안 돼서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은 김여사 등판.
저랑 탭 치고 들어간 김여사가 폭발까지는 한 10분 남짓 걸린 것 같습니다. 김여사는 조사관이랑 난투극을 벌이고, 김여사 비명에 눈이 돌아간 저는 지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직접 봐야겠다며 청원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다가, 김여사 허리가 삐끗하며 잠깐 휴전. 다리를 살짝 절어서 그렇지 평소에 운동 많이 한 아들과, 툭 치면 넘어갈듯한 빼빼 아줌마 조합은 수사관이 경찰을 부르는 상황을 만듭니다..=_=a
씩씩거리던 수사관이 X-레이랑 MRI를 다시 찍어서 국군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오라고 하네요. 아, 뭘 또 오라 그래..
김여사와 나오는데 막막합니다. 당시에는 MRI가 보험이 안 돼서 한 40만 원 돈 했던 것 같아요. 학생식당 밥값이 1200원 남짓하던 시절입니다.
MRI 사진을 들고 이번에는 국군병원으로 갔는데, 저보다 겨우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군의관이 있습니다. 근데 이 군의관이라는 사람이 X레이를 보더니만
“아.. 디스크가 있네..” 이러고 있습니다.
‘아.. 세상에 국군병원이라는 데가 이렇게 뜨문뜨문한..‘
“저.. 저기요? X레이에 디스크가 나오면 아예 걷지도 못할걸요? 그거 말고 MRI를 보셔야 될 것 같아요. 거기 아래 왼쪽으로 하얗게 찍힌 거. 두 개. X레이에서 보실 거는 허리가 지금 좌우로 틀어져 있잖아요. 목이 오른쪽으로 4도쯤 기울었고.”
뭐라고 썼는지 국군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서 다시 후암동에 갖다 주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속이 부글부글합니다. 한 달 아르바이트비가 25만 원인데 50만 원 넘게 깨진 것 같아요. 디스크로 입원하면서 병원비 깨지고 재검한다고 또 깨지고 조사한다고 또 깨지고.. 무엇보다 우리 집이 아들 군대 빼겠다고 로비할 여력이 있는 집이 아니잖아요. 이건 대체 왜 보험이 안돼..
한 달쯤 뒤에 또 불려 갔습니다.
이제 뭐 수사관이고 나발이고, 저 썅놈새끼가 우리 김여사한테 지랄지랄한 그 새끼지. 저거.. 뭐 나름대로 또 조사를 했는지, 아버지 직업이 왜 무직이냐고 묻습니다.
“노니까 무직이죠. 줘요. 노가다라고 다시 써 드릴게. “
“다시 쓰긴 뭘 다시 써. 확인한 거잖아!”
묘하게 공수가 뒤바뀐 느낌으로 앉아 있는데, 자기가 수사관 생활하면서 그렇게 분했던 날은 처음이랍니다. 분해서 잠도 못 잤다는데, 까놓고 말해서 분하긴 내가 분해야지, 나랏돈 받는 공무원이 왜 분해? 야. 헛다리를 짚었으면 미안해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너님 보기에 우리 집 형편이 돈 쳐발라 로비할 형편이 돼 보이냐?.. 차마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씩씩거리는데 제가 생각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라..=_=^
수사와는 상관없는 실랑이를 한참 하다가, 둘 다 신세한탄으로 넘어갑니다. 아.. 대체 왜때문에 사람들이 저만 보면 신세한탄을 하는 걸까요. 얘기를 들어보니, 저한테 면제를 때린 검사관은 돈 받고 면제를 막 날려서 남한산성에 갔고, 그 양반이 면제를 때린 사람들 전부 재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도 갑자기 이거 하라고 불려 왔는데 시간은 촉박하고 조사할 사람은 많다고.. 근데.. 내가 알 게 뭐야.
그러면서 수사 과정 중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쓰라고 A3를 한 장 주네요.
쓰라고?
글로?
구래.
A3 앞뒤 한 장으로는 모질라서 한 장 더 받아서 꽉꽉 채워서 썼습니다. 대선 후보의 아들로 촉발된 수사의 취지와 필요성은 십분 이해하나, 수사에 적극 협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로 단정부터 짓고 수사를 시작하는 작태는 해당 공무원의 기본 소양을 의심케 한다…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를 악무니까 글빨도 잘 받아요. 쭈욱 읽어 보더니 수사관도 표정이 떨떠름합니다.
“범죄자 취급한 거는 미안하게 됐다..”
“아니 뭐.. 저도 뭐.. “
요즘에는 행방불명으로 군대를 안 간 국회의원도 있고, 부동시로 군대를 안 간 대통령도 있으니 이해는 갑니다만, 대충 봐도 몸 쪽 크게 빠지는 공에 헛스윙에 날린 참이라 서로 얼굴 보기가 뻘쭘합니다.
그 뒤로 디스크가 두 번 더 재발했는데, 첫 번째는 서른 살 즈음, 한참 이런저런 일 벌여서 정신없이 아등바등할 때였습니다. 한두 달 또 꼼짝도 못 하고 누워서 보냈지요.
두 번째는 딸래미가 태어난 뒤였습니다. 남자들이 갓난쟁이 가볍다고 애를 한 손으로 안고 다니잖아요. 한 석 달 오른쪽으로 안고 다녔다가 허리가 뒤틀리면서 바로 재발. 역시 또 두어 달 다리를 절었지요.
보드를 타다가 데굴데굴 굴러놓고 창피하다고 벌떡 일어나면서, 허리 아파서 군대 안 갔다고 하면 다들 위아래로 쳐다봅니다만… 나름 열심히 관리하고 있다고.. 크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