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이 써보는 영화 리뷰
앙숙이 된 옛 친구가 아내를 겁탈했습니다. 분노한 기사 장은 일대일 결투를 걸어 복수하려 합니다. 결투에서 패한다면 장와 아내 마르그리트 모두 목숨을 잃겠지만,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장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말에 오른 장은 창을 재촉합니다. 오. 낭만적이네요..
포장지에는 중세 기사가 그려져 있는데, 막상 상자를 열어보면 왜곡된 기억에서 오는 갈등과, 부조리한 사법 제도, 관습으로 굳어버린 남녀 차별 등 묵직하고 날카로운 주제들로 꽉꽉 채워져 있습니다.
캐릭터와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래 포스팅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Hundred Years' War
1336년. 백년전쟁이 시작된 이후 탈탈 털리기만 하던 뿌랑스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도 대차게 말아먹으며 왕이 잉글랜드로 잡혀가는 대굴욕을 당합니다. 다행히 뒤를 이은 현명왕 샤를 5세가 겨우겨우 뿌랑스를 살려 냈지만, 이 냥반도 마흔둘에 덜컥 쓰러지면서 뿌랑스의 앞날에는 또다시 먹구름이 깔립니다.
뒤를 이은 샤를 6세는 이제 겨우 12살. 전시 국정을 초딩 4학년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결국 뿌랑스는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4명의 섭정들이 통치하기로 했고, 예상대로 왕국은 여기저기서 삐걱댑니다.
배경이 백년전쟁인데, 극 중에는 장이 스코틀랜드에서 포위당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원래 뿌랑스와 스코틀랜드는 한편 먹고 있었지만, 잉글랜드 원정에 실패하며 사이가 크게 틀어지고 말았습니다. 노발대발한 뿌랑스는 아예 잉글랜드와 잠깐 휴전하고, 스코틀랜드를 먼저 치자는 얘기가 나올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왕인 샤를 6세는 아직 열일곱. 뿌랑스는 50년째 줄창 깨지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 일어난 반란으로 민심은 뒤숭숭하고, 뭐라도 좀 해보려던 잉글랜드 원정은 시작부터 말아먹었습니다. 이제 곧 왕이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니, 섭정들도 슬슬 몸 사려야 합니다.
이런 복잡 미묘한 시기에 올라온 예민한 재판은 영 달갑지 않습니다. 한미한 출신의 약삭빠른 지주, 평판이 안 좋은 기사, 잉글랜드 편에 붙었던 영주의 딸. 누구 편을 들어도 득 될 것이 없는 골치 아픈 재판입니다.
Trial by Ordeal
시련 재판의 논리는 아주 명료합니다.
- 하나님은 신묘한 냥반이다.
- 따라서 죄가 없다면 어떤 시련도 다 통과할 것이다.
- 물에 빠트리거나 달군 쇠로 지지는 것이라도.
- 끝.
칼 좀 쓰는 기사들은 이 신박한 논리에 큰 감명을 받았고, 약간의 창의력을 더해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그러자, 재판의 형식이 살짝 바뀝니다.
- 아까 그 하나님은 정의롭기도 하다.
- 그니까 둘이 싸우면.. 보다 정의로운 놈이 이길걸?
- 끝.
기사들의 재치에 영감을 받은 권세가들은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걸음 더 나갑니다.
- 그러면.. 다른 사람이 대신 싸워도 되지 않을까?
- 오. 논리 그 잡채입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부조리한 제도라 당시에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보다 못한 교회가 나서서 ‘니네끼리 싸우는데 그분 이름 함부로 팔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성왕 루이 2세도 상고 제도를 손보며 거들었습니다. 300년쯤 뒤, 앙리 2세가 아예 법으로 금지시키며 결투 재판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rashomon. 1950. 구로자와 아키라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 1950년작. 그 해 온갖 영화제를 휩쓸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라쇼몽은 잔학무도한 도적과 대쪽 같은 사무라이, 그리고 정절을 지키려는 사무라이의 아내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과 “사실”이 얼마나 다른 지를 보여 줍니다.
모두가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실을 이야기하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금씩 살을 붙이거나 떼내서 진술하기 때문에 실제 벌어진 “사실”과, 각자가 기억하는 “사실”은 점점 달라지게 됩니다. 거기에 착각과 기억의 왜곡까지 더해지면 “기억하는 사실”과 “실제”는 아예 결이 다른 사건이 되고 맙니다.
The truth according to JEAN DE CARROUGES
장 드 카루주는 용맹하고 충직한 기사입니다.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단신 돌격도 주저하지 않는 올곧은 지주이자, 뛰어난 무예를 지닌 기사입니다. 함께 출전한 자크가 낙마했을 때에도, 장은 재빨리 적을 베어 자크를 구해 냈습니다.
장은 반역자인 로베르가 탐탁지 않았으나, 로베르의 딸 마르그리트에게 반해 결혼을 결심합니다. 장의 결단으로 로베르는 반역의 죄를 씻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결혼 지참금으로 받으려 했던 땅을 영주가 부당하게 빼앗아 자크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아내에게는 추억이 가득한 땅이라 장은 영주의 횡포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장이 영주를 고발하자, 영주는 아예 장이 물려받아야 할 성까지 빼앗아 자크에서 줘 버립니다. 장과 자크는 이 일로 크게 틀어졌으나, 충직한 기사인 장은 국왕을 섬기는 신하들끼리 반목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자크와 화해했습니다.
성이 없는 장은 참전 수당을 받기 위해 종군합니다. 자크는 장을 걱정해 참전을 만류하지만, 현재의 수입만으로는 영지를 운영하기가 벅찹니다. 장은 사랑하는 아내의 환송을 받으며 전쟁터로 향합니다.
스코틀랜드의 공격으로 프랑스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장 역시 휘하의 아홉 지주 중 무려 다섯이 죽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무일푼에 열병까지 앓으며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장은 참전 수당이라도 받기 위해 다시 파리로 향합니다.
그러나 장이 집을 비운 사이, 방탕한 자크는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장은 아내를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크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비록 결투 재판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아직은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가 전쟁 중인데 영주에게 아첨을 하며 재산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자크를 단죄하고, 땅에 떨어진 아내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장은 기꺼이 말에 올라 창을 듭니다.
The truth according to JACQUES LE GRIS
자크는 늘 뒤에서 장을 돕고 있습니다. 전술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이 혼자 돌격할 때도, 자크는 작전이 어그러지는 것을 감수하고 장을 살리기 위해 함께 돌격했습니다. 심지어 장은 강을 건너는 도중 낙마해 자크가 구해 주기도 했죠. 무모한 돌격으로 전투는 패했고, 그 덕에 장은 영주에게 찍혔습니다.
한편, 영주는 주색잡기에만 몰두할 뿐, 영지 경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영지의 재정은 파산 직전이지만, 지주들은 이태째 세금을 체납하고 있습니다. 재정을 관리하게 된 자크는 지주들을 압박해 단숨에 재정 상태를 호전시키고, 그 보상으로 땅을 하사 받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하필 장이 결혼 지참금으로 받기로 했던 옥토입니다.
어리석은 장은 이 땅을 되찾겠답시고 영주를 고발했습니다. 이미 무모한 돌격으로 미운털이 박혀 있는데, 영주까지 고발하는 바람에 아예 단단히 찍혔죠. 자크가 계속 감싸주고는 있지만, 장의 좌충우돌은 이제 부담스럽습니다.
지적이고 영민한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는 문맹에 저돌적인 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르그리트 또한 자크에게 연정을 드러냈습니다만, 자크는 장과의 우정을 생각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에게 모욕을 당한 자크는 마침내 마르그리트를 찾아가 마음을 고백하고 함께 사랑을 나눕니다.
마르그리트는 의례적인 반항을 잠깐 했을 뿐, 스스로 신발을 벗고 자크의 고백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자크는 곧바로 교회를 찾아가 회개하고 기부도 넉넉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겁탈이라는 주장을 그대로 믿은 장은 기어이 자크를 고발합니다. 자크와 마르그리트는 서로 사랑해서 관계를 맺었으며, 이미 뉘우치고 속죄까지 끝난 일입니다.
자크는 겁탈의 멍에를 씌운 장에게 복수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장갑을 집어 결투에 응합니다.
The truth according to THE LADY MARGUERITE
아내를 사랑한다던 장은 지참금으로 받기로 한 땅이 목록에 없다며 혼인식 도중 재산을 확인하던 위인입니다. 땅을 되찾기 위해 아내의 추억이 서린 땅이라고 얘기하고 다니지만, 마르그리트는 그런 추억도, 그런 말을 한 기억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장의 혼인은 땅이 목적이었습니다.
장이 전쟁에 나간 동안, 마르그리트는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을 충동질해 성에서 쫓겨났다고 믿는 시어머니는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태기조차 없는 마르그리트 앞에서 세상 자상한 사람인양, 아기옷을 뜨개질하고 있습니다. 왜 아내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느냐는 압박입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마르그리트는 점점 생기를 잃어 갑니다.
영지도 부족하고 성도 없는 장은 수당을 위해 계속 참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지민들은 장이 제때에 소작료를 걷지 않는다며 직접 세금을 바치러 찾아옵니다. 수에 밝은 마르그리트가 재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궁핍하기만 하던 살림에는 여윳돈까지 생겼습니다.
장이 귀환하던 날, 새 옷을 맞추고 남편을 맞이하는 마르그리트에게 장은 매춘부처럼 보인다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습니다. 여왕이 입는 드레스와 똑같이 맞춘 옷이지만, 무일푼으로 돌아온 장의 자격지심은 엉뚱한 곳에서 칼날을 드러냅니다.
마르그리트는 남편 장과 자크를 중재하기 위해 상냥하게 자크를 대합니다. 딱 사교적인 매너와 약간의 립 서비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만, 자크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바람둥이로 소문난 자크는 책을 좋아한다고 떠벌이지만, 마르그리트가 보기에 자크의 교양은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장미 이야기 / Romance of the Rose :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후끈한 성적 묘사가 일품이라는 걸 봐서는 중세판 썬데이 서울 같습니다.
장이 파리로 떠나자, 자크는 시종을 시켜 마르그리트를 꾀고는 일방적인 사랑을 고백하며 마르그리트를 겁탈했습니다. 제 욕정만을 채운 자크는 뻔뻔한 사탕발림을 지껄이고는, 소문내면 남편 장이 죽일 것이니 '당신을 위해' 소문내지 말라고 협박합니다. 이 새끼를 그냥..
사실을 알게 된 장은 오히려 마르그리트에게 화풀이를 하고, 시어머니는 조용히 넘겼어야 한다며 마르그리트를 비난합니다. 재판정에 앉은 마르그리트에게는 조롱에 가까운 인신공격이 쏟아지지만, 기댈 곳 없는 마르그리트는 이 부당한 비난을 혼자 짊어진 채, 어리석은 남편의 고집과 시어머니의 냉소, 친구의 배신을 묵묵히 견뎌 냅니다.
소리내어 울 수도 없는 마르그리트의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흐릅니다.
자크를 고발해도 영주가 판결한다면 패소할 것이 분명합니다. 장은 왕에게 직접 상고해 결투 재판을 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아내가 겪은 고통에 공감하고, 오랜 숙고 끝에 나온 결정이 아닙니다. 장은 아내의 겁탈 사건에서 앙숙인 자크를 칠 수 있는 기회를 봤습니다. 그리고 결투 재판으로 끌고 가기 위해 온 나라에 이 사건을 떠벌이고 다닙니다.
이미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아내는 사라지고, 자크를 치기 위한 수단인 아내만이 남아 있습니다. 결투 재판에서 패하면 아내가 끔찍하게 화형 된다는 것을 마르그리트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은 것, 정확하게는 그럴 필요조차 못 느끼고 있던 것이 아내를 바라보는 장의 관점을 잘 말해 줍니다.
진실한 사랑 운운하며 말 같지도 않던 소리를 지껄이던 자크 역시 제 명예를 지킨답시고 결투를 받아 들였습니다. 자크가 이긴다면 “진실한 사랑”은 목에 사슬이 묶인 채 불타 죽게됩니다.
신이 승부를 결정한다며 답답한 소리를 하는 장에게, 마르그리트는 누가 먼저 지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것이라고 외칩니다. 당신이 지면 나는 산채로 불타고, 아이는 고아가 된다는 것을 아느냐고. 허영심 때문에 내 목숨을 건 것이냐 따져 묻는 마르그리트에게 장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하는 기사들의 결투?
마르그리트의 눈에는 내 목숨을 걸고, 제멋대로 싸우는 양아치와 모지리의 싸움일 뿐입니다.
Marguerite de Carrouges
망했습니다. 남편은 열혈 바보, 남편 친구는 교활한 난봉꾼, 영주는 무능한 술꾼입니다.
영지를 경영하는 능력은 장보다 낫고, 문학적인 깊이는 자크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현실 감각과 인성만으로 보자면, 당장 영주 바꿔야죠. 하지만 중세에 여자로 태어나, 부당한 차별과 끊임없는 비난에 멍들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위로받아야 할 피해자인 마르그리트는 오히려 궁지에 몰립니다. 다행히 결투에서는 장이 승리했지만, 그 승리에서는 어떤 통쾌함도, 어떤 후련함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마르그리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몸서리치게 끔찍하기만 할 뿐입니다.
몇 년 뒤, 남편 장 드 카루주는 십자군으로 참전했다가 스페인에서 전사합니다. 솔직히 장의 죽음에 큰 안타까움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긴 씁쓸함만이 남아요. 뱃속의 아이가 자크의 아이 아니냐는 노골적인 성희롱에 마르그리트는 말 못 할 속앓이를 했을 겁니다. 다행히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네요.
마르그리트는 장이 죽은 뒤, 혼자 영지를 경영하며 잘 살았습니다.
Sir Jean de Carrouges
용감하고 싸움도 좀 하고 나름의 책임감도 좀 있습니다만, 전략적인 안목과 인망이 매우 부족하고 앞뒤가 꽉 막힌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문맹이었으니, 문맹이 큰 흠은 아닙니다만, 좁아터진 밴댕이 속알딱지는 확실히 문제지요..
마을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잉글랜드의 도발에 말려 그대로 돌격해 버리고, 그 결과 원래 목표였던 마을은 날려 먹습니다. 장이 돌격할 때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이 냉담한 조소를 날리는 것으로 봐서, 평소에도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사람 자체는 그렇게 못된 편은 아니라, 현명한 영주 밑에 있었으면 어느 정도 제 몫을 하며 그럭저럭 살았을듯한데, 영주인 피에르가 워낙 대책 없는 인물인 데다, 제대로 미운털이 박히면서 인생이 크게 꼬입니다.
Jacques Le Gris
기본적으로 인성에 문제가 많은 놈이 영주의 총애를 받으며 고삐가 풀리자 친구의 아내를 겁탈하고, 무죄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처음에는 인정이라도 하더니, 영주가 무죄를 선고할 것을 암시하자 아예 말을 바꿉니다. 극 중에서는 유능한 인재인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이것도 영주인 피에르가 워낙 무능한 인물이라 상대적으로 유능해 보이는 것에 가깝습니다.
흑사병이 돌아 조세 수입이 어려워지자, 그런 건 영주가 알바 아니라고 조언하는 데서 자크가 얼마나 출세지향적이며 위험한 인물인지가 드러납니다. 상식적인 가신이라면 조세를 경감하거나 최소한 유예하라고 권하겠지만, 자크는 영주와 함께 난잡한 파티를 즐깁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크기 전에 잘 죽었다 싶습니다..
Sir Robert de Thibouville
마르그리트의 아버지, 로베르 드 티부빌은 이번 전쟁에서 줄을 잘못 섰습니다. 이전까지는 영주들이 자기 이익에 따라 편을 고르는 게 당연시되었으나, 백년전쟁을 치르는 동안 뿌랑스에는 서서히 국가와 민족 개념이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프랑스 귀족이면서 잉글랜드 편에 선 로베르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 이놈 봐라.." 쯤으로 바뀌며 괘씸죄가 걸립니다.
극 중, 로베르가 이상하다 싶을 만큼 장과 혼인을 맺으려 하며, 고작 지주인 자크에게도 쩔쩔매고, 딸의 재판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것은, 여차하면 반역으로 몰려 멸문당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 보려고 고른 사윗감으로 장 드 카루주라, 로베르의 근심은 깊어만 갑니다.
King Charles VI | the Mad
불안해하는 왕비 이자보에 비해, 왕인 샤를 6세는 실실 웃으며 희번덕거립니다. 그냥 철부지인 왕의 모습을 표현했나 보다 했는데, 찾아보니 샤를 6세에게는 심각한 정신병이 있었습니다. 얼마 뒤, 샤를 6세가 도저히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섭정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 뿌랑스는 내전으로 홍역을 치르게 됩니다.
Pierre d'Alençon
샤를 6세의 친인척으로 딱히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한량. 술 좋아하고 여자 밝히며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인물이죠. 성안에서 벌이는 난잡한 파티에 중신들은 쓴웃음을 짓습니다만, 왕의 사촌이신지라..
입안의 혀처럼 구는 자크를 매우 총애하며, 장과 자크를 중재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오히려 갈등을 조장합니다. 사건 자체는 명백한 자크의 잘못이지만, 영주로써 휘하 가신들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도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랜 전쟁과 흑사병으로 영지 전체가 허덕이고 있는데도, 피에르는 세금을 감면하거나 지주들과 해법을 상의할 의지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자크를 이용해 세금을 더 뜯어내고 그 돈으로 놀고먹는데 전념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새끼가 젤 나쁜..)
우와. 간만에 기사들 나오는 활극인가 보다 했는데, 영화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낚시꾼 없는 낚시질에 걸린 셈이지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이 꽤 복잡합니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뿌랑스 사람 아니면 모르고 흘려버릴 만한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구요.
반면 주제들은 옛날 이야기의 탈을 쓰고 있는 요즘의 이야기들 입니다. 하나같이 한 두 문장으로는 온전히 그 의미를 전달 할 수 없는, 묵직하고 함부로 코멘트하기 어려운 것들이죠. 특히 마르그리트가 겪는 문제들은 현대에도 크게 개선된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사법 정의도 뭐.. 덜 떨어진 놈이 망치 들고 있으면, 판결이 제멋대로인 건 요즘에도 뭐..
1340년 출생. 실제의 피에르 역시 딱히 이렇다 할 뭐가 없습니다.
선량왕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대패하여 잉글랜드의 인질이 됩니다. 대어를 낚은 잉글랜드는 터무니없는 몸값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그 돈을 주고 무쓸모한 왕을 데려오느니, 차라리 왕을 바꾸기로 합니다.
4년 뒤, 잉글랜드에서 놀고먹던 선량왕은 ‘나를 뿌랑스로 보내주면 직접 몸값을 마련해 오겠다’고 제안했고, 잉글랜드는 이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그냥 보내긴 좀 뭐해서 선량왕을 대신할 인질을 대신 받았는데, 그게 피에르 입니다. 사실 잉글랜드에서도 선량왕은 골치 아픕니다. 이제는 왕도 아니고, 괜히 죽이면 욕만 잔뜩 먹을 것 같은데. 지가 알아서 간다니까 못 이기는 척 그냥 보내줍니다.
선량왕이 잉글랜드로 되돌아 올리 없으니, 당연히 대신 인질이 된 피에르는 죽은 목숨이죠. 바꿔 말하면 뿌랑스에서도 고르고 골라서 가장 무쓸모한 인물을 보낸 셈입니다.
그런데 몸 값 마련에 실패한 선량왕이 미안하다며 진짜로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대 반전일 일어납니다. 그래서 장 2세가 죽은 뒤, 선량왕이라는 칭호가 붙었죠. 여기서 말하는 “선량”은 어질다, 올곧다가 아니라, 에둘러 표현한 조롱의 의미입니다. 덕분에 피에르는 살아 돌아왔고, 무쓸모한 난봉꾼 영주가 되어 극 중의 사달을 일으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