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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01. 2024

소나무숲의 애기나리

잠결에 누군가 날 깨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소나무 할아버지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고개만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솔향기로 살살 달래 날 깨운 거지. 난, 울창한 소나무 숲의 보호를 받으며 막 싹을 낸 애기나리야. 내가 사는 숲은 솔잎끼리 촘촘하게 하늘과 땅을 덮어서 키가 작은 식물은 볕을 받기가 쉽지 않아. 게다가 소나무의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 볕이 적어도 견딜 수 있는 난, 소나무 할아버지가 내어준  한 켠에 조그맣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 내 곁엔 이른 봄에 분홍 꽃을 사랑스럽게 피웠던 진달래 아저씨와 작년 가을에 산들바람 타고 숲에 날아온 민들레 누나가 전부야. 그들 모두 나처럼 소나무들과 햇볕을 다투지 않아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데. 햇볕과 양분을 얻기 쉽지 않지만, 다른 식물들과 싸우지 않는 이 숲에 뿌리를 내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어느 날 솔숲 사이 불어온 샛바람이 날 보고 무척 반가워했어. 그는 우리의 흰 꽃이 아기처럼 귀엽고 앙증맞다고 애기나리로 부른데. 그리고 남들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작은 꽃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샛바람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서운해했지. 내가 뭐라고 기분이 살짝 우쭐해지더라. 마파람 불기 전에 꼭 얼굴 보여 달라고 해서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어.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소나무 할아버지에게 살짝 고백했어. "샛바람에겐 비밀이에요. 겨우 싹을 내어 지금은 너무 힘들어요. 전 내년이 되어야 꽃 필 거 같아요. 그걸 알게 되면 샛바람이 얼마나 실망할까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샛바람이 떠날 때 사과하고 내년에는 꼭 보여주겠다고 해라. 네 땅속줄기가 멀리 뻗어나가 대가족이 되어 아름다운 꽃무리를 보게 되면 그도 좋아할 거야!" 그리고 "껄껄" 웃으며 귀여워하셨어. 난, 꽃이 피지 않아도 뿌리로 가족을 늘려갈 수 있거든. 꽃이 핀다고 무조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서 꽃에 매달리지 않아. 그래도 여섯 장의 예쁜 꽃잎이 활짝 웃는 모습 꼭 보여줘야지.

꽃 피울 결심이 서자, 민들레 누나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걸 귀를 쫑긋하고 엿들었어. 너른 들판을 떠나 바람을 타고 여행하던 이야기였어. 솔직하게 너무 부럽더라. 난 누나 같은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지. 쇠박새가 날 먹은 것까진 기억했는데, 깜깜한 어둠 속에 있다가 소나무 숲에 떨어진 것이 전부였거든. 이런 이야기는 창피하고 누구에게 자랑할 수 없으니 시무룩해졌지. 누나를 부러운 눈으로 보았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날 보며 "난 네가 부럽단다." 내가 눈이 커지면서 "어? 그런 게 있어요?" 누나는 "너희가 무리를 이룬 모습을 요정들의 소풍이라고 부른단다. 나도 나의 아이들과 그런 소풍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쏟고 있지" 그 말을 듣고 누나와 내가 서로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지. 그래서 누나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애기나리 열매

누나가 말하길. "너와 나, 저기 소나무 할아버지, 그리고 진달래 아저씨 우리는 서로 다르지?" 난 대답했어. "네 아주 많이." 누나가 빙긋 웃으며 "할아버지가 서로 다른 우리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건 더불어 살아가야 숲이 건강하다는 걸 아시는 거지! 덕분에 모두가 숲의 보호를 받고 있어. 참 고마운 일이지. 우리가 이 숲에서 평화롭게 지내려면 어떡해야 할까?"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 뭐 크게 생각하는 거 없어요.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면 그것으로 좋아요" 그 말에 소나무 할아버지가 미소 지으며 "꽃말에는 소망이 담겨있지. 아기나리의 깨끗한 마음과 민들레의 행복과 감사, 진달래의 사랑 그리고 내 굳센 의지로 이 숲을 품고 있는 한 우린 평화로울 거야" 난 아직 깨끗한 마음이란 걸 잘 모르겠지만, 오랜 세월 이 숲을 평화롭게 지켜온 할아버지 그리고 아저씨와 누나 곁에서 그 마음 느끼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 이제 삭풍이 불어와도 든든해.  샛바람이 다시 찾아오면 꽃이 아닌 살기 좋은 우리 숲을 자랑해야지!


                     

소나무숲의 애기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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