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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n 28. 2024

부끄러움을 깨달은 작약

'꽃의 왕은 모란이고 꽃의 재상은 작약이다'라는 말을 들었어. 왕이 된 모란은 기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작약인 내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모란보다 못한 이유가 도대체 뭐야? 나도 모란만큼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사람들이 그걸 몰라주다니 어처구니가 없네!' 언뜻 느낀 것은 나의 빨강, 분홍 하얀 꽃이 모란을 닮긴 했지만, 나보다 일찍 꽃을 피우는 모란꽃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겨버린 것 같았지. 그래서 봄이 오자 온 힘을 다해 꽃대를 세우고 잎을 펼쳐 함박꽃을 펼쳤어. 그런데 땅속부터 움과 싹을 내야 하는 내가 꾀벗은 몸통에서 싹을 내는 모란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먼저 끌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어. 나보다 보름 넘게 빨리 활짝 핀 모란이 마치 승자인 것처럼 비웃는 것 보였지. '난 패배자가 되었고 그간의 노력이 헛되었구나!' 이렇게 무너지는 마음이 나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어.

작약, 길쭉한 잎

어느 날 내 아래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꽃을 피웠던 할미꽃이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으로 나에게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어. "야! 넌 좋겠다. 사람들에게 약으로 불리는데, 난 이쁘다는 소리는 원하지도 않아! 할미꽃이 뭐냐? 내 뿌리도 너처럼 약으로 쓰는데 그걸 알아주지도 않아!" 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지. "그러면 뭐 해? 난 모란에 밀려서 만년 이등이라고!" 할미꽃이 비웃었어 "공룡 발바닥처럼 생긴 잎을 가진 모란에게 열등감을 갖는구나! 꽃은 며칠 피고 지지만 너의 잎은 일 년 내내 푸르고 날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다 깨달았어. '내가 모란보다 절대로 시시하지 않다는 것을 저 할미꽃은 알고 있는데, 정작 모란만 질투하고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구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잘못되었구나 깨달았지. 

할미꽃

'세상은 나 홀로 오롯이 사는 것은 아니다'라고 알게 해 준 것은 꿀벌이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꿀벌이 오지 않으면 씨앗을 맺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꿀벌에게 꿀과 화분을 아낌없이 주는 것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 믿었어. 하지만, 그것은 오직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꿀벌을 유혹했던 것뿐이야. 그처럼 아름다운 꽃도 사람들의 인정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할미꽃의 말에서 작약이라는 이름을 왜 붙여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 그들은 내가 상할까 가뭄과 장마에도 심혈을 기울여 몇 년 동안 돌봐주고 있었어. '나의 뿌리가 아픈 이들의 건강을 되찾게 해 주니 귀하게 여기며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닐까?' 약이란 이름에는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존중이라는 가치가 있지. 희생과 베풂을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뿌리가 있었음을 돌아보게 되었어. 내가 모란을 앞서려 했던 것은 아무 의미 없었던 것이지. 

모란꽃. 공룡 발가락처럼 투박한 잎

세상에는 예쁜 꽃도 미운 꽃도 없다고 해. 스스로 노력해서 꽃을 피웠다는 사실 하나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일 거야. 모란이 웃는 것은 나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꽃을 피운 것이 즐거웠던 것을 내가 삐뚤어지게 바라본 것이지. 내가 불행하다 생각한 것은 나와 남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이제부터 나를 보듯 모란도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겠어. 사람들이 내게 부끄러움이란 꽃말을 지어준 것은 꽃봉오리가 붉은빛을 띠는 것이 마치 수줍게 부끄럼을 타는 것 같아 불렀다지. 그런데 이제부터 내가 잘난 체하려 할 때마다 나의 꽃말을 떠올려야겠어. '세상에 나보다 못난 꽃은 없으니 부끄러워해!'라고. 이제 겨울이 찾아오면 나는 새롭게 태어날 봄을 기다리며 뿌리로 돌아갈 거야. "할미꽃 넌 정말 멋진 친구야.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줘 고마워. 그리고 너도 나처럼 생명을 돌보는 좋은 꽃이야"

작약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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