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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섭 Nov 15. 2024

아주 보통의 하루(#아보하)는 소중하다

일상이 특별해지는 여행지 "고향"

 간호사로 3교대 근무를 하면 장점이자 단점이 있다. 장점은 평일날 쉰다는 거. 단점은 나 혼자 평일날 쉰다는 거. 그래서 쉬는 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게 어렵다. 이번에는 수, 목, 금 쓰리 오프를 받았다. 3일 동안 쉬면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도서관이나 서점 가서 책이나 볼까, 집에서 청소하고 잠이나 잘까, 헬스나 할까, 등산이나 갈까. 기껏 생각한 것들이 평소에 다 하던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길게 쉬니까 평소에 안 하던 걸 하고 싶었다. 그래 까짓 거 나 혼자 여행이나 가자!

 어디로 갈지 고민하며 네이버 지도를 켰다.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한반도 호랑이의 몸통 아래 부분을 집중적으로 쳐다봤다. ‘전라도 너무 멀어. 부산 더 멀어 안돼. 강원도 저번에 갔다 왔잖아. 제주도 3일 가볼까? 아니야 비싸. 이거 참 고민이 되는구먼.’ 그때 엄마랑 전화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태섭아 영주는 언제 안 오나?"


벌써 5년

 내 고향 경상북도 영주. 청량리역에서 KTX 타고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공기도 좋고, 한우도 저렴하게 먹을 수 있고, 가을을 맞아 부석사에 단풍도 참 이쁘게 잘 폈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면서 힐링하기에는 참 좋은 곳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지겨워져서 서울로 떠나왔다. 이미 25년 동안을 영주에 있으면서 충분히 다 즐겼기 때문이다. 공기는 좋지만 가끔씩 소똥 냄새가 나고, 한우는 저렴하지만 오마카세 같이 멋진 곳이 없고, 가을 부석사는 이쁘지만 한강처럼 사계절 내내 질리지 않는 곳이 없다. 게다가 부모님 얼굴도 며칠 전에 서울에서 봤는데 굳이 영주를 갈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결국 여행지를 찾지 못했다. 오프 첫날 여행 안 가고 신도림역 주변에서 독서 모임을 했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는데 마침 1호선이었다. 파란색 호선을 보니 청량리역이 생각났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떠올랐다. "태섭아 영주는 언제 안 오나?" 

 고향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즉흥적으로 코레일톡 어플을 켰다. 영주로 가는 막차가 있었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영주역에 오후 11시 40분에 도착했다. (MBTI 극 J라고 생각했는데.. 요즘따라 즉흥적인 선택을 많이 하는 중이다)


 영주에 온 걸 서프라이즈 하고 싶어서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금 더 늦게 들어가도 걱정은 안 하실 거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맛있는 걸 사 먹으러 갔다. 바로 랜떡(랜드로바 떡볶이)이라고 불리는 떡볶이다. 택시를 타고 기사님에게 말했다. "시내에 있는 아디다스로 가주세요" 시골이 좋은 점은 아디다스가 하나밖에 없어서 소통하기 편하다는 점이다. (택시 타고 나이키로 가주세요. 홈플러스로 가주세요. 심지어 분수대로 가주세요도 가능하다. 영주 가면 택시 소통 꿀팁이니 써먹으세요!) 모두가 문을 닫은 새벽에 아디다스 근처에서 랜떡만 밝은 불빛을 내고 있었다.  

 기차를 타기 전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었지만 떡볶이 배는 따로 있었다. 평소 떡볶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부터 먹었던 음식이라, 랜떡은 기똥차게 먹는다. (사진 보니 침이 또 고이네 츄릅) 대중적인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엄청 맵다. 고추장 맛이 강하게 나는 쌀떡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맛있다. (쯔양도 다녀갔다) 나 혼자서 5천 원어치나 흡입했다. 다 먹고 배가 불러서 집까지 걸어갔다.


 도로에는 거의 차가 다니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에 조용한 도로가 내심 무서워졌다. 문득 미친놈 누군가가 칼 들고 뛰어오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괜히 가슴 쫙 펴고, 허공에다가 양 주먹을 날리고, 큰 눈 더 크게 뜨고, 세상 건들건들한 모습으로 집에 도착했다. (어쩌면 누구보다 내가 미친놈으로 보였을지도)

 집에 도착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방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었다. 엄마가 가늘게 눈을 떴다. "누구세요? 어 태섭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프라이즈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누구야. 태섭이 아니야? 너 왜 지금 여기에 있어" 엄마가 눈을 비비며 앉았다. "이거 꿈이야? 왜 말을 안 해. 빨리 말해!" 엄마는 당장이라도 때릴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몸은 귀신이라도 본 듯 조금씩 떨고 계셨다. 더 이상 하면 기절하실 것 같아서 활짝 웃으며 엄마를 안았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엄마"


 다음날 내가 어릴 적 쓰던 방에 기분 좋은 햇빛이 들어왔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약간의 소똥 냄새도 나는데 어쨌든 맑고 시원한 공기였다. 자연을 보면서 힐링도 하고 싶었다. 집 앞에 한강 1/5 크기의 서천이라는 곳이 있다. 마침 그곳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다. 부석사도 좋지만 엄마 손잡고 집 앞 서천으로 나갔다.

 

 "태섭아 우리 맨발로 한 번 걸어볼까?" 평소 청결의 정도를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엄마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신발이랑 양말을 다 벗었다. 옆에 엄마를 보니 말은 먼저 꺼냈지만 머뭇거리며 서있었다. 역시나 청결 여왕. 정여사 냉큼 발을 가져 오시오. 내가 대신해서 양말, 신발 싹 다 벗겨드렸다!

 맨발로 단풍이 떨어져 있는 흙길을 걸었다. 흙이 밟혔다. 돌이 밟혔다. 자갈이 밟혔다. 낙엽이 밟혔다. 영주 땅의 기운을 받았다. 발냄새가 정화되었다. 시원한 냄새가 났다. 한강에서 이러면 유리라도 밟힐까 무섭지만 여기서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그만큼 조용하고, 깨끗한 청정 도시다. 걸을 때마다 아프지 않고,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30분 정도 계속해서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예전처럼 맛있게 집밥을 먹었다. 예전처럼 부모님과 대화를 나눴다. 예전처럼 내 방에서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하루가 지나갔다. 침대에 누워서 영주에 온 선택을 되돌아봤다. 예전처럼 특별한 게 없던 하루였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토록 내가 지겨워했던 일상이었다. 하지만 '어떤 곳보다 너무 좋았다. 내 고향 영주 여행'. 김영하 작가는 여행에 대한 좋은 점을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에 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의 이유" 중에서

 

 예전 나에게 영주는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울이 나에게 그런 공간이 되었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 이번 영주 여행은 그런 것들을 잊고 현재를 오로지 즐길 수 있게 해 줬다. 현재에 집중하면 부모님과 대화, 집에서 먹는 밥, 집 근처 맨발 산책, 매콤한 랜떡처럼 평범한 일상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무탈하고 안온했던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렇게 고향 여행은 ‘일상’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데 확실히 도움을 준다. 삶이 힘들고, 지루할 때 그리운 고향으로 힐링여행을 가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드넓은 산 보다, 시원한 바다보다 최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맨발 걷기 강추)



-"여행의 이유"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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