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날 때마다 생각하기
어떤 남자가 응급실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아 배 아파! 빨리 좀 해줘요! 왜 내가 먼저 왔는데 저 사람부터 하는 거야. 나 죽을 거 같다고!"
그는 어젯밤부터 소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응급실에 들어온 지 겨우 2분 지났는데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본인부터 빨리 해주기를 원했다. 급한 건 알겠지만 응급실은 먼저 온 순서가 아니라 의료진이 분류한 순서대로 진료를 본다. (*KTAS 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
이미 응급실에는 심장이 안 좋은 사람, 의식이 없는 사람을 먼저 치료하고 있었다. 소변이 아무리 급해도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 이상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환자 분 지금 생명 위독한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더 기다려 주셔야 해요. 지금 의료진들 다 저기부터 봐야 해요."
그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더니 욕설을 섞어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아니 너 시 x 진짜. 네가 뭔데 나한테 더 기다리라 말라야! 내 배가 지금 터질 것 같다고! 하늘이 샛노래! 내가 진짜 응급환자인데 누구보고 자꾸 기다리라고 하고 있어! 씨 x 빨리해 줘! 나 죽어!"
어이없는 욕을 듣고 있으니 화(火)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옆에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있다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인류애를 상실한 건가? 겨우 소변 안 나오는 거 가지고 저렇게 난리를 쳐도 되는 건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 치료도 못 할 정도로 난동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그를 먼저 침대 안쪽 자리로 데리고 갔다.
"환자 분 이제 소리 그만치고 여기 침대에 누우세요. 지금 바로 해드릴 테니까."
그가 소변이 안 나오는 이유는 전립선 비대증(전립선이 부어서 소변 통로가 좁아지는 현상) 때문이었다. 남자라면 거의 대부분 걸리게 되는데 70대에는 70%, 80대에는 80%, 90대에는 90% 확률로 걸린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휴 나는 아직 30%) 응급실에서의 치료는 단순 배뇨(얇은 소변줄을 요도에 넣어 방광에 있는 소변을 임시적으로 배출해 주는 것)를 통해 치료한다. 그 이후에는 비뇨의학과를 통해 원인적인 치료(수술 및 시술)를 안내한다.
내가 그 남자의 옆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바지랑 속옷까지 내려주세요" 그는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화를 참으면서 치료했다.
"차가워요" 소변이 나오는 부분을 소독했다.
"아파요" 얇은 소변줄에 젤을 잔뜩 묻혀서 요도 입구로 빠르게 넣었다.
그 순간
"으아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막혀있던 요도를 통해 소변이 터져 나왔다. 콸콸콸!
"으아아~" (30초 후)
"우와아~" (1분 후)
"어우야.." (1분 30초 후)
"ㅓㅜㅑ" (2분 후)
"..." (3분 후)
방광이 줄어드는 만큼 그의 목소리도 작아졌다. 3분이 지나자 눈을 감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갑자기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어? 뭐지 혹시 의식 처진 건가? 내가 잘못한 건가?'
나는 급하게 소리쳤다.
"환자 분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그러자 누워있던 그가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게 아니고요."
"진짜. 너어무 시원해요. 너어어무 고마워요. 선생님이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와 어쩜 이렇게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기술을 배웠을까. 정말 너무 좋은 일한다. 부모님께서 아주 자랑스러워하시겠어. 최고야 아주 최고!"
의식을 잃은 게 아니었다. 의식을 모두 가진 거였다. 유쾌, 상쾌, 통쾌한 생각들을 뇌에서 싹싹 긁어모으느라 눈을 감았던 거였다. 그의 황홀함은 소변통에 1L를 채울 때까지 이어졌다.
성인의 정상 방광 용량은 300-400cc다. 그는 정상의 3배 가까운 용량이 방광에 갇혀서 안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가 처음에 화를 냈던 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그래 나는 맥주 500cc 먹고 2시간도 못 참는데, 1L나 방광 안에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지'
그는 퇴원하면서 응급실에 있던 의료진 한 명 한 명에게 아까는 미안했다고, 고맙다고, 생명의 은인이라며 인사를 한 후에 떠났다.
책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요즘은 화가 나면 일단 3초를 센다. 3… 2… 1… 숫자를 끝낸 뒤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운다. “그럴 수도 있지.” 이 간단한 마법 같은 주문은 불타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미지근하게 식혀준다.
내일도 응급실에는 수많은 짜증이 튀어나올 것이다. 예민한 사람, 재촉하는 사람, 인상 쓴 사람, 심지어 욕하면서 화내는 사람까지. 언제나 내 하루를 쉽게 망쳐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찾아올 거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볼 거다.
"이래도 화 안 낼 거예요? 이래도 스트레스 안 받을 거예요? 엘레렐렐레ㅔㅔㅔ"
화(火)는 불과 같은 성격이라서 옆에 있다 보면 쉽게 옮겨 붙는다. 그래서 언제나 화가 날 수 있고, 언제나 스트레스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성격이 아니다. 잠깐의 기분이다. 그리고 환자들도 똑같다. 원래 성격이 아니라 잠깐 아파서, 잠깐 괴로워서, 잠깐 힘들어서 그런 거다. 여기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사소한 말이 그 잠깐을 기다려 줄 수 있게 해 준다.
"많이 아파서 그런가 보다. 그럴 수도 있지"
보통 고통이 심할수록 응급실에 오자마자 화를 낸다. 하지만 처치가 되고 증상이 호전되면 금세 누그러진다. 화를 냈던 환자 분들은 대부분 진심으로 사과하거나, 진심으로 감사를 말하고 퇴원한다. 나도 일하면서 언제나 화가 날 순 있지만, 언제나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방심한 사이에 화(火)는 서로에게 옮겨 붙어서 큰 화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사소한 말이 우리들의 마음을 항상 촉촉하게 적셔주면 좋겠다. 환자들도, 의료진도, 나도 더 이상 마음속에 화(火)가 나지 않을 수 있도록.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태수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