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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삶을 쓴다는 건

소설 연재

by 태섭
하주는 글을 다 쓰고 다시 살펴봤다. 기억하지 못하면 흩어지는 일상이 보였다. 그 일상을 붙잡는 일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과 닮아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야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해야 비로소 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삶을 쓴다는 건, 이런 순간을 오래 붙잡아 두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이미 있는 빛을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하는 일. 잊기엔 너무나도 소중한 순간들일 테니까.

독서모임을 한지 벌써 1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매미는 싱그러운 여름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울고, 가을 서리는 나무를 두드려 잎을 떨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던가. 바닥에 포개지는 낙엽처럼 멤버들이 읽은 책도 차곡차곡 쌓였다. 공통 도서는 한 달에 한 권. 하주와 멤버들 모두 열두 권과 함께 계절을 건너왔다.


태호는 자신의 독서량이 대한민국 평균의 열두 배라며 좋아했고, 상혁은 지난달 공통 도서인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류시화]가 가장 재미있었다며, 이제야 자신에게 맞는 책의 결을 알 것 같다고 들떠 있었다. 하주도 책을 읽고 감상문을 꾸준하게 작성했다. 자신의 SNS [남의 간호]가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지는 몰랐다. 처음 게시물을 올릴 땐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나, 내 삶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쓰나 망설였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조회수도, 좋아요도, 댓글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냥 하는 거지 뭐. 다른 의미가 뭐가 필요해.'


그렇게 속상함을 달래며 계속 쓰다 보니, 오히려 꾸준함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주는 1년 동안 자신이 올린 게시물들을 차례대로 넘겨보았다.


[1년에 100권 완독 하기. 게시물 no.1~no.112]


애초 목표는 100권이었지만, 돌아보니 조금 더 읽었다. 초반엔 목표 권수를 채우려 아등바등했다. 활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머리를 쥐어뜯고 눈을 비볐다. 그의 동그란 눈엔 충혈만 가득했다. 그러다 여러 권을 한 번에 열 쪽씩만 읽는 방식으로 바꾸고부터는 숨이 고르게 쉬어졌다. 권수에 매이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읽히는 대로 읽으니 오히려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한 달 열 권, 1년이 지나자 no.1에서 no.112까지 페이지가 포개졌다.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지만, 세상엔 더 대단한 독자들도 많았다.


하주는 독서가 있는 삶이 좋았다. 책 안에 있는 문장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의 삶에 도움을 줬다. 처음에는 감상문을 적는 것도 서툴렀다. 일기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개인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부끄러워도 올리다 보니 누군가 자신의 일기를 훔쳐보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꾸준함을 좋게 본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팔로워도 서서히 늘어, 이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감상문을 함께 읽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미 글을 쓰는 사람인 걸까.'


하주는 점점 욕심이 났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책들처럼, 자신의 글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내 기록이, 내 글들이 누군가에게 닿고 있을까?'


그는 계획형 인간이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계획했고, 내 집 마련을 위해 미친 듯이 실행했다. 그는 계획이 있어서 성공했을까? 아니, 지금 그는 성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하주는 늘 같은 의문에 닿았다. 인생이란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인간은 필연보다 우연에 지배받는 존재 같다고. 저 위에 계시는 전지전능한 분께서 기분이 좋으면 그날따라 맛있는 커피를 주시고, 기분이 별로면 엄청나게 쓴 커피를 주셨다고. 아무리 치밀하게 예측해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계산해 대비한다고 해도 인간의 삶은 전지전능 앞에서 무력했다.


그러한 이유가 있더라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낸 사람은 달랐다. 김연아는 '어떻게 성공했느냐'는 인터뷰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그냥 하는 거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서, 해보고 싶은 일이라서 하는 것. 내 기록이 언젠가 누구에게 닿을지 말지는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하주는 글을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세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 쉬는 날에도 도서관에 갔고, 약속 시간 전에는 서점에 가서 좋은 글귀를 모았다. 그는 오늘도 출근 한 시간 전 병원 탈의실에 도착해 노트북을 펼쳤다. 지나가던 동료가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냐고 물었다. 하주도 이제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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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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