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책들은 이렇게 번번이 그를 멈춰 세웠다. 필요하다 믿었던 책은 의외로 금세 덮여 버렸고, 반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던 책이 밤새 머릿속을 붙잡아 두기도 했다. 책은 늘 그의 예상을 배신했다. 그러나 그 배신 속에서 오히려 길이 보였다. 하주는 깨달았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책은 답을 내리는 책이 아니라, 끝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남겨주는 책이라는 것을. 그것이 소설이든, 인문이든, 과학이든, 에세이든, 고전이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병원을 로비를 나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지친 눈빛들이 번쩍 되살아났다. 마치 오래 잠겨 있던 창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 들어오는 빛처럼, 그들에게 하나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독서모임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거창한 건 없었다. 하주, 상혁, 태호, 그리고 일곱 명의 지인들이 함께했다. 신기하게도 멤버는 모두 삼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 의사로 이루어졌다. 시작은 단순했다. 복잡할 건 없었다. 일단은 해보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하주는 열 명의 사람들을 단톡방에 초대했다. 독서모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각자만의 목표를 이야기하자고 운을 띄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꾸준하게 읽는 습관을 기르고 싶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독서 평균을 올리겠다는 거창한 목표의 태호와, 이 세상에서 배꼽이 빠질만한 재밌는 책-천 권을 찾아보겠다는 상혁만, 기름이 섞인 물처럼 유독 튀었다. 아직 뜨거워지기 전에 기름은 생각보다 물과 잘 섞였다. 규칙들을 이야기하며 서로가 잘 융합되어 갔다.
첫 오프라인 모임날의 풍경은 노을이 멋지고, 구름이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모든지 첫날의 기억은 오래간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첫 발을 내디딘 날, 대학 캠퍼스에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노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첫 출근 전에 화장실 거울을 보던 순간, 첫 내 집 마련 후 텅 빈 거실을 비추는 따뜻한 햇살의 감촉처럼. 하주는 페이지의 첫 모임도 그의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될 거라 생각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상혁의 말과 함께 독서 토론의 시작은 '밥'이었다. 식구가 되려면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모두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직까지 체계는 서툴렀지만, 좋은 사람들과 모였다는 자체로 행복했다. 열 명의 멤버가 족발집에 앉았다. 모두가 기분 좋게 족발을 뜯었다. 목안에는 기름이 흘렀다. 시원하고도 목 넘김이 씁쓸한 그것이 필요해졌다. 그렇게 족발, 소주, 맥주 한 잔 두 잔 먹다 보니 분위기가 올라갔다. 멤버들 모두 들떠서 2차까지 가려고 했다. 그때, 늦게 도착한 멤버 한 명이 그들의 목적을 일깨워줬다.
"늦게 도착해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요... 혹시 저희 독서토론은 언제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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