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기간에 상담센터를 찾은 이유
처음엔 그저 예민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손에 땀이 나고, 밤마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들 그런 거 아니었나?
런던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을 때도 불안은 낯설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았고, 다들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나도 그냥 스스로가 '조금 걱정이 많고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2년 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계기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늘 시험을 망치는 상상을 하면, 이상하게도 '세상이 두 쪽 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머리로는 고작 기말고사가 그렇게 큰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위급 상황이라도 닥친 것처럼 반응했다.
2020년 2월, 종강 한 달 전. 프로그래밍 수업의 기말 과제가 공개됐다.
그날 밤, 숨이 막혔다.
제출 기한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도, '못 끝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문득 손목이 축축한 걸 느꼈다.
손과 발에서 땀이 흘렀다. 키보드를 치려고 하면 땀방울이 자판 위로 떨어졌다.
같은 증상이 매일 밤 반복됐다.
결국 상담센터를 찾아가기로 했다.
솔직히, 정말로 치료가 필요하다고 믿어서라기보다는, 훨씬 더 속물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과제를 끝내지 못할 경우, 상담 기록이 있으면 학교에서 참작해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상담 당일, 대기실에서 문진표를 작성했다. 평소 느끼는 우울과 불안 증상을 체크하는 문항들이었다.
문진표를 건네자마자 상담사가 말했다.
"바로 약물치료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당황했다. 나는 단지 증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능하면 약물치료는 피하고 싶어요."
상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약물 없이 치료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넘으셨어요".
그렇게 학교 근처 병원(GP)과 연결되었다. 6주간의 인지행동 치료(CBT) 세션도 예약되었다.
솔직히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사의 태도가 단호해서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다행히(?) 영국의 느린 의료 시스템 덕분에, 병원 진료를 받기 전에 귀국하게 됐다.
병원 예약을 기다리는 3주 사이, 영국에 코로나가
학교는 모든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정신과 진료는 미뤄둔 채, 급하게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온라인으로 남은 강의와 인지행동치료를 받았다.
몇 주 뒤, 다시 학교로부터 메일이 왔다.
"다음 학년 전면 온라인 수업."
그렇게, 나는 영국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됐다.
당황스러웠다. 유학을 시작한 이후로 한국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영국 대학 도서관에서 새벽에 풀리지 않는 수식을 붙잡고, '다음 해엔 휴학하고 잠시 한국에 머물까?'라고 상상하곤 했지만, 이렇게 뜻밖의 방식으로 실현될 줄은 몰랐다.
그때 문득 영국 심리 상담사의 단호한 표정이 떠올랐다.
'... 혹시 모르니까 한국에 있는 정신과에서 진료를 받아볼까?'
집 근처에서 가장 빨리 예약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았다.
이틀에 걸쳐 정밀 검사를 받았고, 진단이 내려졌다.
상담사의 말이 맞았다. 나는 단순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당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다.
"조울증과 불안장애."
나의 첫 진단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