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prologue-
*주의*
2007년 미국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만 24살까지 총 2년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살았다.
2006년 나는 만 11살이었고 영어권 국가로 조기유학을 보내는 게 한창 유행이었다.
언제나 가족의 중요성과 화목함을 강조하던 부모님은 주변에 그렇게 사례가 많고 오빠와 나를 보내보라는 수많은 권유에도 흔들리지 않는 몇 안 되는 부모들이었다.
오빠의 경우, 만 15살이었기에 부모님께서 결정권을 주었는데 오빠는 단번에 한국이 좋다며 거절했다.
오빠는 나보다 순하고 똑똑하지만 나만큼 무모하거나 모험적이지는 않다.
나의 경우, 아직 아이 었기에 부모님이 생각도 안 하셨는데 영화에서만 보던 나라들을 직접 경험하고 영어를 솰라솰라할 수 있다는 들뜬 생각에 나는 부모님께 역으로 조기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은 적잖이 놀라셨고 나에게 영어 시험 토플을 몇 점 이상 받아오면 허락하겠다고 했다.
말했듯이 나는 오기로 가득 찬 사람이다.
목표가 있으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보는 사람이다.
이렇게 된 계기가 있을까 생각하고는 하는데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오기가 많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실 나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나의 노력과 내가 생산해 낸 결과에 당당할 수 있는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실례, 더 나아가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 보니 끝없는 자아성찰과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피곤한 인생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지 않은가.
나는 나 자신과 내가 초래한 결과들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당당하게 부모님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토플 성적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약속을 한 부모님은 나를 캐나다에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캐나다를 가서 나를 데리러 오신 캐나다 홈스테이 엄마는 정말 다정했다.
금발에 파란 눈, 영화에서나 보던 사람이 내 눈앞에서 영어를 솰라솰라하고 있었다.
캐나다에 오기 전 분명 부모님이 영어 회화를 위해 한국계 캐나다인 과외 선생님도 붙여주셨는데 나는 한 마디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글쎄, 그 때의 과외는 공부보다 영어를 가미한 베이비시팅 같다. 나는 어렸을 때 꽤나 천방지축 꾸러기였어서 영어 표현 하나 배우면 David 선생님 팔 근육에 " :) "를 낙서하게 해 주셨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의 팔은 펜으로 그린 온갖 웃는 얼굴들로 가득했다. 선생님의 다정함과 무엇보다 내 영어 이름을 지어주신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지금은 연락하지 않아도 종종 생각나는 분이다.)
집에 오는 길에 홈스테이 엄마께서 열심히 내게 질문을 해주셨는데 사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건 "hobby"라는 단어 하나를 캐치해서 "figure skating"이라고 한 것 밖에 기억이 안 난다.
집에 와 홈스테이 아빠, 언니, 여동생, 강아지 Rufus까지 만났지만 나는 여전히 제대로 한 마디도 못 꺼냈다.
밤이 되었고 외로움과 집과 가족에 대한 향수가 넘쳐흘렀다.
침대에 누워 꺼이꺼이 울고 있는데 내가 새 방에 잘 적응했는지 확인차 방문한 홈스테이 엄마가 나를 발견하고는 꼭 안아줬다.
"Do you miss your family?"
(끄덕끄덕)
"Do you want to call them?"
(끄덕끄덕)
국제 전화 카드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수화기 너머 서로의 눈물을 들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영어도 금방 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특히 홈스테이 경험이 많은 내 홈스테이 가족을 봐오던 옆집 가족도 홈스테이를 시작하면서 옆 집에 살게 된 같은 유학원 출신 한국 언니를 만난 게 참 행운이었다.
Kelly 언니는 배울 게 많은 언니었다.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지만 겁이 많은 나와는 달리 여러 것들을 도전하고 책도 많이 읽는 멋진 언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마음을 가진 언니는 내가 향수병에 빠질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또 다른 행운은 내가 캐나다에서 만난 이들이다.
내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와 같이 새 학기에 부임한 교감 선생님이셨는데 학생의 잘못을 훈육할 줄 아는 카리스마와 힘든 시간을 겪는 학생에게 다정함을 주는 교육자로써 훌륭한 분이셨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밴쿠버 근처 바다 끝 동네라서 학교에 유학원 애들 몇 명 외에는 학생이든 선생님이든 유색인종을 찾기 힘들 정도의 학교였다.
(재밌는 점은 올해 4월 밴쿠버를 가게 되어서 학교를 검색해 봤는데 웬걸, 아주 다양한 인종으로 가득한 학교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라는 건 참 재밌다.)
거기에다가 2006년이면 K-culture가 그렇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라서 "I'm from Korea"라고 하면 북쪽인지 남쪽인지 질문받았다.
북한인지 남한인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들어온 건지 동급 남학생들은 내가 개고기를 먹는다며 놀리고는 했다.
그러면서 새콤달콤이나 마이쭈 하나에 굽실대던 어린 친구들..
내 담임 선생님께서는 외국에서 홀로 온 나를 더 챙겨주시고는 했는데 그러다가 남자아이들이 나를 놀린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친구들을 아주 호되게 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종차별은 뭣도 모르는 어린애들이나 하는 건 줄 알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2007년 4월 16일, 미국 버지니아텍 공대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본인의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여러 명이 목숨을 잃고 본인 또한 죽음을 선택한 비극이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여느 때처럼 등교를 했고 나를 포함한 학생들이 좋아하는 drama 수업을 듣게 되었다.
드라마 수업 선생님께서 오늘은 어제의 비극과 관련된 수업을 하겠다고 했다.
팀을 나눠 살인자와 여러 피해자들을 연기할 건데 모든 학생들이 보는 와중에 콕 집어서 나와 같은 유학원 출신의 오빠에게만 살인자 역할을 하라고 했다.
나는 왜 우리에게는 그 역할을 정해주냐 물어보니 "살인자와 같은 출신의 나라에서 왔으니"라고 답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 뱃속에서 느껴지는 울렁거림, 내 깊은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내 몸을 가득 채웠다.
한국인 오빠를 포함한 동급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짝지어 연기를 준비했다.
나는 그냥 내 자리에 앉아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이 소용돌이들을 되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교실 밖으로 불렀다,
미안하다고.
뭐에 대해 미안한지의 설명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은 각 팀에게 학급 앞에서 공연하라고 하였고 모두 그렇게 하였다.
심지어 누군가의 죽음을 연기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그 모습들에 나는 구역질이 났다.
(특히, 같은 한국인인 그 오빠가 아무 생각없이 가해자를 연기하고 자신의 퍼포먼스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일 때 같은 한국인으로서 엄청난 수치와 분노를 느꼈다.)
모두의 연기가 끝나고 선생님은 우리 모두를 자리에 앉혔다.
그러고는 이미 내 자리에 앉아있던 나를 콕 집어 물었다.
"How do you feel that you share the same heritage as the murderer?"
"I feel ashamed right now...
not because I'm Korean, but because of what you are doing right now."
내 속에서 무언가 폭발하였고 나는 더 이상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로 교장실로 향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 설명했다.
교장 선생님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바로 내 담임 선생님을 호출하셨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선생님들께서는 내 홈스테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세 명의 어른들 사이에 앉아 눈물을 터뜨리며 내가 겪었던 수모를 또 한 번 이야기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께서 며칠 후 교육청에서 사람들이 와서 이 사건을 조사할 거라고 했다.
그날이 되었다.
교육청 직원 분은 영어-한국어가 가능한 통역도 제공해줄 수 있으니 내 뜻이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 말라고 하셨다.
Thank you,
but I will speak in English as I want to make sure I deliver everything.
나는 담임 선생님, 홈스테이 엄마, 교육청 직원들 두 분과 한 방에서 그날의 일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신기하게 이 때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억울함과 상처받은 마음보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일어서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까?
며칠 후 드라마 선생님이 2주간 정학 징계를 받았다고 들었다.
(어른이 된 지금으로서 징계가 조금 약했던 것 아닌가 싶긴 하지만..)
우리는 2주간 드라마 수업 대신 자습 시간을 가졌다.
첫 주까지만 해도 내 친구들은 드라마 선생님에게 같이 분노해 줬다.
하지만 둘째 주가 되자 나는 "nothing serious"한 작은 일에 분노해서 모든 학급의 재미를 2주간 뺏어간 공공의 적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처음 군중 속의 외로움과 인간의 간사한 이면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담임 선생님과 내 홈스테이 가족, 동네 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얼굴도 잘 모르는 홈스테이 동생 친구의 어머니께서 내게 손 편지를 전해주셨다.
내가 겪은 일에 대신 사과하며 이로 인해 캐나다, 캐나다인들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처음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캐나다에서의 일 년은 어린 나에게 인간과 세상의 아름다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