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울림 Jun 19. 2024

엄마 아빠라는 이름

Orphaned duckling, Adopted duckling

한국과의 시차에 맞춰 합격 봉투와 찍은 셀카를 카톡으로 보냈다.

몇 초가 흐리긴 했을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부모님을 보자마자 눈물이 팡하고 터져버렸다.

부모님의 불거진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그게 가족 아닐까.


욕심부려서 멀리 가버린 이기적인 딸의 부모님을 향한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

어제까지만 해도 아기 같았던 딸이 내 품을 벗어나 고생 후 원하는 걸 이뤘다는 부모로서의 자랑스러운 마음.


원래 감정과 애정을 보여주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엄마, 아빠였지만

그 날 만큼은 거리가 무색할 만큼 부모님의 감정이 화면을 너머 온몸으로 전해졌다.


다정하고 인간다운 부모님의 눈물 덕에 나는 다정함과 인간다움을 배웠고

그걸 표현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눈물을 보는 것은 매번 마음 아프지만 동시에 감사한 일이다,

나를 향한 애정과 진심을 보여주시는 거니깐.


캐나다에 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내가 왕따 당하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나의 가족은 나와 함께 울어줬다.


그런 가족을 어른이 다 되어 내 결정으로 외국에 나왔음에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나도 모르게 그리움에 사무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정말 나도 내가 당황스럽다.


미국 의대의 경우, 미친 학비를 자랑한다.

내가 다니게 될 의대의 경우, 한 학기당 학비와 학교 생활 관련 비용만 학기당 $28,500으로 거의 한화 4천만 원에 상당한다.

거기에다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깐 생활비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그래서 미국 의대생의 경우 아주 아주 부잣집 자제가 아닌 이상 대부분 학자금을 대출받는다.

매일 7-9%의 이자가 붙지만 다른 사기업에 비하면 양호한 정부에서 주는 학자금을 받는다.


정부에 여러 서류들을 작성 후 제출 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정보 중 하나가 legal guardian(법정 후견인)이다.


무엇이든 미국 정부와 관련된 일처리를 할 때 나는 orphaned duckling이 되고는 한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내 부모님은 외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법정 후견인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온전히 독립한 어른이었다고 하더라도 법정 후견인 란은 채워야 한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채워야 하는 빈칸이다.


서러움과 그리움에 나는 컴퓨터 앞에서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터벅터벅 2층으로 올라가 공부하고 있는 남편 앞에 주저앉아서 울어버렸다.

당황한 남편은 무슨 일이냐고 황급히 물었고 나는 콧물을 삼켜가며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특유의 긍정 파워로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You're NOT an orphaned duckling.
You're an adopted duckling!


남편과 결혼하면서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깐 입양된 게 맞기는 한데..

그래도 내 가족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워지는 내 가족은?

남편의 따뜻한 재치에도 내 서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남편과 손을 잡고 1층에 내려와 내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

남편이 알려주는 대로 시아버지를 첫 번째 법정 후견인, 남편을 두 번째로 적으면서 불현듯 아빠가 생각났다.


나의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가까운 시기에 돌아가셨다.

어느 날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이제 고아야.


거의 60이 되어 정말 고아가 된 아빠는 무슨 심정이었을지.

부모를 잃는다는 슬픔은 얼마나 클지.

부모뿐만 아니라 내가 적을 둘 곳이나 사람,

나를 위해 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는 자에게 세상은 얼마나 외롭고 차갑게 느껴질지.


그렇게 나는 눈물을 그치고 낯선 이의 아픔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복에 겨운 사람인데 이깟 서류에 마음이 흔들려 울어버리다니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 상황이 남보다 낫다고 내 아픔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니지만

나는 부모님이 네 분이나 있으면서 왜 내 눈물과 감정을 낭비하는 건가 싶었다.

(이래서 자기 연민은 위험하고 공감은 나를 더 단단하고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 같다.)


반성과 깨달음이 지나간 후, 서러움이 가득했던 마음속에 갑자기 고마움으로 가득 찼다.


살면서 나는 다양한 부모님이 존재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훈육하고 사랑해 주는 큰 이모, 큰 이모부.


학교에서만큼은 엄마, 아빠 같았던 담임 선생님들.


차별 하나 없이 나를 대해주고 사랑해 줬던 캐나다 홈스테이 부모님.


그리고 결혼하고 새롭게 생긴 시부모님.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서로의 부모님에 대한 호칭을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아무래도 나는 뼛속까지 대한민국 유교걸이라서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어붙었다.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면서 시부모님은 내게 선택권을 주셨다.

본인들 이름을 부르든지 아니면 그냥 mom, dad라고 부르든지.

하지만, Mr, Mrs에다가 성을 붙여서 부르는 건 너무 남 같으니 안 된다고 하셨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어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나보다 어른인 분들한테 도저히 이름으로는 못 부르겠고

그렇다고 편하게 막 엄마, 아빠라고 부르기도 좀 그렇고..


그러자 엄마가 바로 답했다.


엄마, 아빠 안 서운해. 그렇게 불러도 돼.


혹시라도 내가 엄마, 아빠 서운할까 봐 그러는 건 줄 알고 엄마는 나한테 배려로 먼저 그렇게 이야기해 줬다.


그 순간 나는

엄마 아빠라는 이름이 종종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올바른 부모로서 성취해 내는 이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고 배려해 주는 엄마, 아빠.

그 이름을 성취해 낸 엄마, 아빠를 떠올리면서 내 시부모님의 따스함을 떠올렸다.


문화 차이와 배경 때문에 가끔 부딪혔던 시엄마도 그 누구보다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나의 엄마였다.

어딜 가나 아들 둘만 있었는데 딸이 생겨서 너무 좋다는 엄마.

무작정 본인 아들 편이 아니라 내 편을 들면서 나한테 잘하라고 아들을 혼내기도 하는 엄마. 


집에 찾아뵐 때마다 언제나 나를 제일 먼저 안아주시는 시아빠.

에어컨에 추울까 봐 항상 내 자리로 재킷이랑 담요를 바리바리 가져다주시는 시아빠.

남편한테는 bear, 아주버님한테는 tiger이라는 어릴 적부터의 애칭처럼 내게는 raccoon이라는 애칭을 주신 아빠.


그렇게 나는 시부모님을 mom, dad라고 부르게 됐다.


사실 시댁과 살갑게 지내고 가까이 살아도

여전히 나는 내 가족이 그립다.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음에 감사하려 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사랑과 진심이 오갔고 오감을 증명하니깐.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엄마라는 이름을 얻고 싶다.

생물학적인 아이를 낳고 싶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적을 둘 곳, 사람 없는 이에게 믿고 쉬어갈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나의 그리움과 서러움을 고마움으로 채우고

나뿐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할 그 누군가를 위해서

매일매일 더 나은 사람, 더 멋진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나 자신, 파이팅.

작가의 이전글 미국 의대에 입학한 한국인 pt.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