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에가는길 Oct 03. 2024

엄마가 나를 무시하는 꿈

엄마마저 나를 몰라주면 어떡해

 엄마랑 싸우는 꿈을 꿨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엄마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넌 예술가는 아니야". 대충 내게는 무언갈 창조할 만한 자질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듣자마자 발끈했다. 창조적이지 않다고? 내가? 나는 평생 문학과 함께 살았는데?

 그때부터 내 구구절절한 반박이자 자기 PR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어릴 때부터 글 읽고 쓰는 걸 얼마나 좋아했고 또 잘했는지 열변을 토했다. 돌아오는 엄마의 반응이 시큰둥해서 항변은 점점 더 구차해졌고 과장과 허풍도 섞였다. 초등학생 때 반 친구들이 내 글을 읽고 통곡을 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봐도 엄마는 요지부동이었다.

 답답함이 고조되다 보니 나중엔 상당히 과격한 주장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글을 잘 썼다고 말하며 그 근거로 어릴 때 글쓰기 대회에 나가는 족족 상을 타 왔던 일을 들었다. 그런데 글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엄마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그럴 리 없다"고 하는 것 아닌가. 너무도 황당하고 억울했다. 나를 제일 잘 알 법한 사람이 그렇게 부정해버리면 정말 아닌 것만 같잖아?

 꿈에서 깨어나기 전 나는 무척 격앙되어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내게 질려하고 있었다. 엄마랑 대화하면 너무 열받는다고도 말했지만 그 말조차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정신적 충격이 꽤 컸는지 나는 몇 초간 그게 꿈이었다는 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채로 허망하게 누워있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엄마랑 싸웠다고 일기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논쟁에 이렇게 열을 올렸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열심히 반박하고 있었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꿈속의 저를 그토록 발끈하게 만들었던 것은 엄마의 "넌 예술가는 아니야"라는 한 마디였지요. 꿈속에서 예술가라는 단어로 표현되긴 했지만 맥락에 따르면 문학인으로서의 소양이나 자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문학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니 누군가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물론 화가 나고 반박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 말을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결코 이 정도로 욱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대단한 문인으로 거듭나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강렬한 감정에 휩싸였던 진짜 이유이자 이 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저를 부정하고 평가절하했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과 분노가 이번 꿈의 테마입니다.




 인간은 극도로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세상에 인간으로 살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서로를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거부하며 살고 있고, 타인의 평가나 인정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정신분석학의 한 갈래인 대상관계 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은 이러한 영향이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먼 과거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대상관계 이론에 따르면 생애 초기에 인간은 중요한 대상, 즉 부모와 같은 보호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만들어 갑니다. 나는 누구인지, 타인은 어떤 존재인지, 관계란 무엇인지, 환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들이지요. 그리고 이 틀이 이후의 긴 생애를 살아가는 데에 근간이 됩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타인으로부터 태어나 성장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생애 초기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는 중요한 타인 또는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얻는 다양한 형태의 지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심리적 건강과 행복도를 높이는 요인입니다. 동시에 스트레스 사건이나 사고, 질병과 같은 삶의 다양한 위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가장 강력한 보호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영향의 크기는 대상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소비자 심리학에서 주로 쓰이는 개념인 유대강도(tie strength)에 대한 연구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연구들에 따르면 개인은 강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신뢰하고, 그들의 평가를 더 믿을 만하며 진심어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때문에 가까운 이들의 평가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행복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 꿈은 꽤 악몽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타인인 엄마가 저를 인정해주지 않는 고통은 저와 상관없는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이 저를 비난하는 것보다 더 무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꿈속과 달리 현실의 엄마는 제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하진 않을 것입니다. 사이가 늘 좋은 모녀는 아니지만, 저희 엄마는 저의 어떤 부분들은 아주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제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저희 엄마는 지극히 평범한 제가 아주 특별하고 천재적인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언젠간 대단한 책을 펴낼 것이라고요. 그래서 저도 제 자신을 쓰다듬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는 참으로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우리를 아끼고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거대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듬고 인정해 주는 것만이 우리가 한평생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의 전부가 아니겠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