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생산자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다.
후드득.. 후드득.. 젠장.. 비 오네.
어젯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근심 걱정으로 잠 못 이룬 게 아니라 오늘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렘, 기대감, 가벼운 긴장감 때문이었다.
[출근을 빨리 해 회사 옥상에서 촬영을 하고 릴스를 완성해 업로드한다.] 이것이 오늘 나의 계획이었지만 비가 와서 그냥 집에서 촬영하는 걸로 변경했다. 덕분에 둘째가 촬영을 도와줘서 수월하게 끝내 수 있었다.
작년 12월 수익화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인스타를 시작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11개월가량의 시간을 돌아보니 콘텐츠를 생산한다기보단 무료 도서를 보기 위한 리뷰 행렬에 불과했다. 물론 책 값을 많이 아낄 수 있었던 건 감사하다.
5월엔 1일 1릴스를 하며 콘텐츠 생산자로서 발돋움하려 했으나 얼굴과 목소리를 공개하지 않고 하려니 제약이 많았다. 생각나는 아이디어와 찍어보고 싶은 릴스들은 많은데 나를 찍을 수 없어 이거 빼고 저거 빼고 나니 할 게 없었다.
그동안 내가 나오는 콘텐츠를 만드는 게 망설여졌던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볼지가 걱정이 되서였다. 가뜩이나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내가 화면에 나오는 내 모습을 이쁘게 봐 줄리가 없다.
'너무 뚱뚱해서 보기 싫다..'
'하아.. 턱살.. 얼굴이 넙데데하네.'
'말은 왜 저렇게 못하노.'
이런저런 생각들로 나를 괴롭힐게 뻔했기에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콘텐츠의 시대에 언제까지 콘텐츠를 소비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내가 변해야 함을 알고 있었고 조금씩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어보자 결심한 후 나를 촬영하고 편집해 업로드했다. 짧게 지나가는 내 모습을 찍어 올렸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는 이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볼 결심을 했다.
어떠한 모습이건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간단한 율동 하는 걸 촬영했다. 13초짜리 영상을 위해 며칠 동안 노래를 듣고 춤을 연습했다. 소실적엔 '서태지와 아이들' 춤도 따라 하고 'NRG'의 고난도 춤도 따라 했건만 몇 안 되는 동작인데 잘 외워지지도 않고 춤선이 이쁘지도 않았다. 촬영된 내 모습을 보니 그냥 손과 발을 퍼덕이고만 있다. 그런데...
바지는 꽉 끼어서 거슬리고, 이중턱은 자꾸 눈에 밟히고, 무릎이 아파서 뒤뚱뒤뚱거리고 있는 모습이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자꾸자꾸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즐거웠다. 그 모습은 13초짜리 하나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애쓴 나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추천 책을 선정하고, 책들을 잘 소개하기 위해 고민해서 글을 쓰고,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 춤을 추고,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담기 위해 편집에 공을 들인 나라서 춤은 좀 못 춰도 그저 좋았다.
콘텐츠 생산자가 되면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더니
나도 콘텐츠 생산자가 쬐끔은 되어가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