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책 상징 읽기
글 : 마크 콜라지오반니, 그림 : 피터 H 레이놀즈 (1. ‘점’ 작가 참고), 옮긴이 김여진/우리학교
미국 로드 아일랜드 주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이며 어린이책 작가이다.
어느 날, 주인공은 제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다른 길로 가기로 결심한다. 맨 처음 그는 걱정들을 내려놓는다. 잘한 걸까 하는 의심이 피어오르자, 그는 의심들을 다시 내려놓고 떠난다. 걱정과 의심을 내려놓고 나니 침착해진다. 그는 곧장 수영장의 다이빙대로 걸어간다. 과거 다이빙대에서 실수하여 등으로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뛰지 말까 하는 두려움이 든다. 두려움을 내려놓고 뛰어내린다. 이번에도 등 쪽으로 떨어져서 무척 아프다. 역시 난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좌절감을 버리고 다시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데 성공한다. 그는 반대쪽으로 가니 모든 것이 잘 풀린다는 걸 깨닫는다. 좌절감, 두려움, 의심, 걱정들이 아주 가벼워진 걸 깨달은 그는 앞으로 그들을 잘 지켜보기로 한다. 만약 이것들이 다시 말썽을 부려 제대로 되는 게 없을 땐 다른 길로 가리라 다짐한다.
표지에는 많은 짐을 든 아이가 커다란 길 안내 표지판을 올려다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표지판에 쓰여 있는 ‘다른 길로 가’가 책의 제목이다.
이 책의 원제는 ‘When Things Aren’t Going Right, Go Left’이다. 제목이 곧 이 책의 주제인데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제목에 쓰인 ‘right’는 ‘바르게’의 뜻도 있고, ‘오른쪽’의 뜻도 있다. 작가는 이 ‘right’가 ‘left’와 맞물려서 이중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When things aren’t going right, go left.”를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다른 길로 가라.”로 읽을 수도 있고, “일이 오른쪽으로 가지 않을 땐 왼쪽으로 가라.”로 읽을 수도 있다. 언어유희적인 표현이다.
제목에서뿐만 아니다. 이 책의 영어 원문은 본문에서도 다중의 의미를 가진 단어 ‘right’와 ‘left’를 자주, 그리고 교묘히 부려 씀으로써 글이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게 한 것뿐 아니라 반복되는 단어들을 소리내어 읽을 때 기분 좋은 운율을 느끼게 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말 번역문은 영어의 이런 특징을 살릴 수 없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의 원서를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우리말 ‘오른쪽’과 ‘바른쪽’이 동의어이다. ‘오른’은 ‘올다(옳다)’에서 온 말이고, ‘바른’은 ‘바다(바르다)’에서 온 말이다. 즉 오른쪽은 옳은 쪽이고, 바른 쪽이다. 이들의 반대말인 ‘왼쪽’의 ‘왼’은 ‘외다’에서 온 말이다. ‘외다’는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으나 예전에는 ‘그르다’의 뜻으로 널리 쓰였던 단어이다. ‘왼쪽’은 그릇된 쪽, 잘못된 쪽이다. ‘외다’에서 온 ‘외로’라는 단어가 있다. ‘왼쪽으로’의 뜻도 있고, ‘바르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뒤바뀌게’의 뜻을 가진 부사이다. 반의어는 ‘오르로’이다.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 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1930년대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의 제 5연이다. 여기에 ‘외로 된 사업’이 있다. ‘나의 인식과 의도를 벗어나 어긋난 행위를 시도하는 사업’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어 ‘right’도 ‘오른쪽’과 ‘옳다’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When things aren’t going right, go left.”를 “일이 오르로 가지 않을 땐 외로 가라.”로 해석하면 우리말 문장도 영문과 똑같이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책 제목 “When things aren’t going right, go left.”을 단순한 언어유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책의 제목은 상징이다. 작가가 제목에 중의적인 뜻을 담아 함축해 놓은 말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오르로 가지 않을 때는 외로 가야 한다.” 즉, 내가 옳다고 여겨 살아온 인생길이 잘못 되었다고 느낄 땐, 지금껏 그릇된 길인 줄 알고 피해 왔던 다른 인생길을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마크 콜라지오반니가 쓴 글에 천재적인 그림작가 피터 레이놀즈가 그림을 그려 완성한 그림책이다. 인생에 관한 무겁고 추상적인 주제의 글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시각화한 점이 탁월하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의 글이 상징적인 그림과 결합하여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 책의 그림은 온통 상징이다.
첫 장면이다. 배경이 채도 낮은 회색과 보라색으로 음울하다.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배경이 인물의 심리를 상징한다. 주인공이 멀뚱한 눈으로 갈 곳 모르는 채로 서 있다. 끌고 가야 할 짐들이 많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짐의 무게가 엄청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힘겨운 상태에 놓인 인생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주인공은 외로 가 보자고 마음먹는다(“So I desided to go left.") 이제까지 살아오던 인생과는 다른 길, 외로 된 길.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걱정만 하며 살아왔다. 머리를 짓누르며 걱정해서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걱정을 당장 내려놓았다.
걱정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딱딱한 나무상자로 표현했다. 상자에는 ‘취급주의’라고 쓰여 있다.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걱정의 이미지가 잘 구상화되었다.
짓누르고 있던 걱정을 내려놓고 나니 머리가 가벼워졌다. 물론 걱정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가지는 않는다. 걱정들이 상자 속의 괴물들로 상징화되어 있다. 독자들은 빨갛고 사납게 생긴 괴물들을 시각적으로 보며 걱정들이 괴물처럼 얼마나 머리를 무섭게 짓누르고 있었는지 놀라며 깨닫는다.
다음은 의심이다. 내가 과연 잘한 일일까, 하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다. 이제껏 무겁게 질질 끌고 오던 의심 보따리도 놓아버렸다.
의심은 또 다른 험악한 모습을 한 괴물이다. 의심이란 괴물들도 지금껏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히고 있었음을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보여 준다.
떨구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걱정과 의심의 괴물들을 내려 놓으니 비로소 침착해진 자신을 느낀다. 걸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다음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뼈아픈 실패의 기억에서 비롯된 강한 트라우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로 그 실패의 장소인 수영장의 다이빙대로 간다. 다이빙에서 실패하여 매우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이빙대를 올려다보기만 해도 두렵다.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이빙에 도전해야만 한다. 여전히 두렵다.
다이빙대는 누구에게나 도전하기 두려운 대상을 상징화한 사물이다. 높은 곳에서 저 아래 깊은 물 속으로 뛰어내려야 하는 것.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떨린다. 잘못 떨어지면 고통이 뒤따른다.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져내릴 때가 있다. 더 큰 도약을 위해서 자의로 떨어짐을 택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 두려움이라는 단단한 짐가방을 내려놓아야 한다.
두려움의 괴물들이 아우성치며 말리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빙대로 올라가는 뒷모습에서 용기가 보인다.
풍덩! 물 속으로 뛰어내린다. 아, 이번에도 실패다. 난 아무래도 안 된다는 좌절감이 밀려온다. 아직 내려놓지 못한 짐이 있다. 그건 좌절감이라는 짐이다. 실패한 경험 때문에 등에 딱 달라붙어 있던 좌절감이라는 짐마저 벗어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이제 진짜 홀가분해져서 다시 도전에 나선다. 좌절감 괴물들이 비웃으며 방해하지만 굴하지 않고 다이빙대에 올라 선다. 좌절감, 트라우마를 벗어 던지고, 실패한 그것에 당당히 도전하기로 한다.
포기란 없다고 자신에게 되뇌이며 망설임 없이 풍덩! 곧장 뛰어내린다. 드디어 성공이다.
물에서 개운한 모습으로 올라오는 주인공의 표정이 뿌듯함과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지금껏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으로 깊이 빠져 있던 좌절감에서 벗어난 얼굴이다. 자존감이 회복되었다. 책의 첫 장면에서의 얼굴과는 대조적이다.
주인공은 ‘왼쪽’으로 가면 갈수록 일이 잘 풀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왼쪽으로 걷는다. 떠나왔던 길이다. 떠나기 전에 마음 속에 들어 있던 좌절감, 두려움, 의심, 걱정들이 아주 작아졌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좌절감, 두려움, 의심, 걱정들을 나타낸 괴물들은 모두 상징이다. 하나같이 사납고 무섭고 독한 모습들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달라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과 잘 들어맞는 그림들이다.
주인공이 인생의 방향을 틀어 다른 길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런 괴물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괴물들을 마음속에서 내려놓는 게 바로 다른 길로 가는 일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구어 낼수록 길이 열린다.
주인공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이제 힘이 약해져서 더 이상 자신을 휘두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데리고 간다. 그것들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잘 지켜보며 사이좋게 지내기로 한다.
자신이 끌고 다니던 무거운 짐, 자신에게 달라붙어서 자유로운 삶을 가로막던 괴물과 같은 짐들은 결국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결국 작가가 말하는 왼쪽길이란 자신의 내면의 힘을 믿고 걱정, 의심, 두려움, 좌절감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내가 주인인 삶이다.
“만약 만약 얘네들이 다시 말썽을 부린다면, 또 제대로 되는 게 없으면 그 땐 다른 길로 가면 돼.”
‘left’가 왼쪽이든 반대쪽이든 다른 길이든 그것은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삶의 방식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이 문장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려 할 때는 그것들을 즉시 내려놓고 자존감을 회복하여 당당하게 살라는 메시지다.
처음엔 낮은 명도와 채도를 가진 회색, 검푸른 색, 보라색 등으로 어둡고 차갑고 우울한 배경색이었던 그림이 점차 주황, 노랑과 같은 밝고 선명한 배경색으로 바뀐다. 다이빙에 성공하는 장면부터는 채도와 명도가 높은 선명한 노랑으로 등장인물의 활기차고 자존감 높은 심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이다.
이 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그림책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이란 파도를 타며 살아가는 어른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림책을 보다 깊게 감상하고 향유하는 것은 글과 그림의 상징성을 제대로 파악해야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