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책의 상징 읽기
글·그림 이수지 / 길벗어린이
한국과 영국에서 회화와 북아트를 공부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림책을 펴냈다. 책의 물성을 이용한 작업과 글 없는 그림책의 형식으로 아이들의 놀이와 에너지를 책에 담는다. 독립 출판사 ‘흰토끼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작가 최초로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그림작가 부문 수상, 『여름이 온다』로 2022년 ‘볼로냐 라가치상 픽션 부문 스페셜 멘션’, ‘뉴욕 타임스 그림책상’, ‘보스턴 글로브 혼 북 명예상’, 『강이』로 ‘한국출판문화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부모가 싸운다. 아이는 울고 싶다. 집 밖으로 나와 망연히 앉아 있는데 앞에 검은 새 한 마리가 마주보고 있다. 나도 새처럼 날개가 있었으면 하는 순간 새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더니 아이를 들어올려 등에 태우고 날아오른다. 소녀와 새는 구름을 뚫고 높이 올라 들판을 건너고 바람을 느끼며 멀리 바다까지 날아간다. 소녀는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온다.
이 책은 2007년 우리나라와 프랑스 리라벨(Lirabelle) 출판사에서 동시에 출간하였는데, 2023년 표지를 바꾸고 글의 배치 등을 약간 수정하여 새로 출간했다.
석판화로 그리고 찍어 만들었다는 이 책은 흰 바탕에 검은색 그림으로만 구성되었다. 굵고 가는 선들이 치밀하게 얽혀 있는 그림들은 마치 연필로 그린 듯하다.
표지의 그림은 검은 새의 얼굴과 목 주위의 모습이다. 새의 눈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하면서도 슬픔이 느껴진다. 앞, 뒤 표지를 펼쳐보면 새의 등에 아이가 있다. 아이를 태우고 날아가는 검은 새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내지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표지를 넘기면 검은색 면지가 나온다. 면지가 검은색인 책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이 책이 면지를 검은색으로 제작한 이유는 틀림없이 내용과 관련이 있겠다.
이어지는 면지에 행복한 듯 춤추는 소녀의 뒷모습이 있다. 그런데 소녀의 그림자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날개를 활짝 편 새의 모습이다. 그림자가 검은 새이다.
첫 장면에 슬프고 곤혹스러운 표정의 여자아이가 있다. 까맣고 어지러운 배경이 아이의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이는 집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온다. 강아지만이 친구다. 아이의 위쪽에 검은 새 한 마리가 난다.
아이는 땅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검은 새가 아이 앞에 내려앉는다. 아이는 새를 응시하며 ‘나도 너처럼 멋진 날개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말줄임표에는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략되어 있다. 아이가 원하는 게 뭘까?
눈 앞에 있던 작은 새가 갑자기 커졌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새는 아이를 들어올리더니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집이 조그만 점으로 보인다.
새의 등 위에서 겁 먹었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와 하나가 된 자신을 느낀다. 아이는 새와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몇 번이나 구름을 뚫고 올라가
들판을 건너 큰 바람을 쫓아갔어요.
아이는 바람의 속삭임을 듣는다. 바람의 속삭임은 뭘까? 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날아 보겠다는 자기 내면의 소리이다.
“새에 매달리지 말고 너 스스로 일어나 날아 봐. 할 수 있어. 자! 준비 됐지? 가볍게 하나, 둘, 셋!” 바람의 말대로 아이는 용기 내어 새 위에서 일어선다.
아, 내가 날고 있어요.
새가 까아, 하고 웃었어요.
아이는 새와 따로, 또 함께 하늘을 날며 함께 즐거워한다. 둘은 아주 멀리 날아가 드디어 아이가 좋아하는 바다 위를 난다.
우린 아주 멀리,
내가 좋아하는 바다까지 날아갔어요.
이 장면이 이 책의 절정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바다였다. 앞서 ‘나도 너처럼 멋진 날개가 있었으면….’ 뒤에 생략된 말은 ‘바다에 가고 싶다’였다. 넘실대는 파도가 역동적이다. 그 위를 기세 좋게 나는 검은 새와 그 위에서 따로 날고 있는 아이의 당당한 모습이다. 지금까지의 약하고 슬프고 움츠린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만족해진 아이는 땅으로 내려온다. 무용수가 높이 뛰어올랐다가 마루를 밟듯이 새에게서 내려 사뿐히 착지한다. 앞서 책의 면지에 있는 춤추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주인공의 이와 같은 모습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 아이의 본래의 모습. 아이는 검은 새와의 바다 여행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는 미소 띤 얼굴로 새와 작별한다. 헤어짐이 슬프지 않다. 언제든 다시 만나 행복하게 함께 날 수 있으니까.
현실로 돌아온 아이와 강아지가 서로를 격렬하게 반긴다. 아이는 검은 새 이야기를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다.
맨 처음 슬픔 가득했던 아이의 얼굴이 이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까맣고 어지러웠던 배경이 밝고 안정되게 바뀌었다.
아이는 어른들과의 사이에서 힘이 없는 존재다. 싸우는 부모를 보면서도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른들은 상대방을 비난하느라 아이의 슬픔과 외로움을 살펴 주지 못한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괴로운 현실에서 아이는 어떻게 할까? 상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이만이 가진 상상의 힘. 아이는 자기 마음 속에 살던 작은 새를 불러내어 거대한 새를 만든다.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집을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를 보면 슬픔이 사라질 것 같다.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가 새라면 날아서 갈 텐데. 아이는 상상 속에서 새를 만들어 낸다. 바다까지 날아가기 위해서는 작은 날개로는 안 된다. 아주 큰 날개를 가진 커다란 새여야 한다. 아이는 상상이 만들어 낸 아주 거대한 새를 타고 높이 날아오른다. 집이 조그만 점으로 보인다. 슬픔도 아주 작아졌다. 바람을 가르며 들판을 지난다. 처음엔 하늘을 나는 게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상상의 힘은 새에 의지하지 않고도 혼자 날 수 있게 했다. 상상 속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바다 위까지 시원하게 행복하게 날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슬픔이 사라지고 행복감이 남았다. 이 행복감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것이다.
검은 색 면지와 검은 색만을 사용한 그림은 아이의 어두운 내면을 상징한다. 검은 색 선으로, 하늘을 꽉 채운 새의 날개와, 하늘을 날 때의 속도감과 바람의 결까지 나타낸다. 아이와 새, 강아지, 바람 등 그림으로 보여주는 역동성이 이수지 작가의 탁월함이다.
‘검은 새’는 아이의 내면의 소망이다. 작가는 이미 앞의 면지에서 춤추는 아이의 그림자를 검은 새로 나타내 아이의 내면을 상징해 놓았다. 새가 검은색인 이유는 아이의 내면이 어둡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아이는 소망을 위해 힘을 발휘한다. 상상의 힘이다. 그 힘은 아주 커서 스스로 행복을 찾고 어둠과 혼란을 밀어내게 한다. 현실의 슬픔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아이들이 가진 상상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