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할아버지묘지명

by 우연 Feb 10. 2025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에서는 누이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고단한 삶을 향한 찬사가 뒤엉켜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정적인 문체에 감정을 애써 눌러 담은 듯 보였다. 특히 ‘뒷기약’이라는 단어에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누이의 얼굴을 보고 싶은 감정이 묻어있었다.

 이 글을 보면서 내가 겪은 두 죽음이 떠올랐다. 하나는 여섯 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어린 나이여도 분주하게 할머니 집에 맡겨지던 잠깐잠깐의 장면은 어렴풋이 솟아나기도 한다. 진짜인지 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에서 울다가 세수하다가 그러다가 문을 여는 엄마도 기억한다.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이제 와서 보니 손가락 사이로 다 새어나갔다. 그나마 남은 모래 몇 알은 쌍둥이 언니와 내가 다리 찢기를 하며 재롱을 피웠던 한 알, 김밥에서 맛살을 빼먹자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으라시던 한 알… 교통사고라고 들었다. 사연은 모른다. 묻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여즉 외할아버지를 묻지 못한 엄마를 위한 나름의 위로로 두었다.

 둘은 초등학고 고학년 즘이었다. 가족들이 둘러싼 죽음이었다. 운이 좋은 건지 혹은 나쁜 건지 의사의 연락을 받는 모든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친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나와 쌍둥이 언니도 오도카니 서있었다. 솔직히  오르락내리락 친할아버지의 생명을 표시하는 숫자의 의미가 덜 와닿았다. 그 숫자가 0이 되던 소리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빠의 표정을 보고서야 가슴이 조금 아팠을 뿐이었다. 뭔가 진심으로 더 슬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만에 하나 내가 할아버지 두 분의 묘지명을 썼더라면, 얼굴이 붉어지도록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혼인으로 인해 생이별한 남매조차 상대 삶의 고찰과 함께한 추억이 있음에도 나는 할아버지와 공유가 불가한 삶을 살았을뿐더러 추억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박지원은 누이를 참으로 아끼고 추억했나 보다. 나도 박지원처럼 떠나보냄에 슬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편히 쉬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녀 상대와의 기억을 추억하고 싶다. 죽음을 주제로 한 글에서 소중한 주변 사람들의 삶, 그리고 나의 삶의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었다. 염치에 불구하고 내가 죽은 후에도 나를 백자증정박씨부인묘지명을 쓴 박지원 마냥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길 소망해 본다.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박지원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스러운 사랑에 관하여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