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온 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자주 도망쳤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불편해서였다.
'회피'라는 단어는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주 사소한 선택 하나에서 시작되곤 한다.
병원 예약을 내일로 미루는 선택, 씁쓸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입술을 다무는 선택, 책을 펴기 전 괜히 방 청소를 시작하는 선택.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회피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1. 시간에 붙는 이자는 복리다.
치과는 늘 '지금 아니면 나중'이라 말하지만, 내 선택은 항상 '나중'이었다. 돈이 없고 시간도 없어서 미룬다는 그럴듯한 이유였지만 결과는 항상 반대였다. 처음에는 스케일링이었는데, 나중엔 신경 치료, 그리고 결국 임플란트까지. 미루지 않았다면 어렵지 않게 해결됐을 치과 진료가 회피하다 보니 어느새 큰 추가요금이 붙게 되었다. 작년부터 시작한 치과진료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무려 500만 원 가까이 치과에 돈을 쏟아부었다. 커리어도 그랬다. 이직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귀찮음과 현재를 즐기는 편안함이라는 달콤함은 이직준비를 회피하게 만들었고, 어느 순간 기술부채의 무게감은 복리이자가 붙어 더 많은 공부를 필요하게 만들었다. 회피를 하기 위해 미루는 건 마치 대출과 같다. 그리고 점점 더 미룰수록 고금리 장기 대출로 변해 간다.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갚아 나가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대출을 갚아 나가려 한다.
2. 피노키오처럼, 말하지 못한 죄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적이 많다.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혹은 분위기를 망칠까 봐 조심하다가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지나친 순간들이 많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 삼키는 것이 삶에 긍정적인 경우들도 많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에 반대되는 의견이라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또한 회피한다면 회피라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삼키는 것과 같다. 어느 정도는 몸이 해결해 주겠지만 일정량이 넘어간다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다만 이 회피가 삼키는 게 좋을지 밖으로 내뱉는 게 올바른지에 대한 판단을 보다 잘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식단관리를 하려 한다.
3. 게으름일까? 두려움일까?
'내가 너무 게으른가?' 이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해야 할 걸 미룰 때,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낼 때, 그런데 한참을 들여다보니, 게으름은 겉모습이었고 속에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틀릴까 봐, 실패할까 봐,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봐, 그런 마음이 먼저였고 이를 위안 삼기 위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특정 시험에서 떨어질까 봐 열심히 안 했어와 같이 자기 위안을 하는 것과 비슷한 거 같다. 지금부터라도 두려움이라는 녀석이 게으름으로 진화하지 않고 더 열심히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4. 굳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회피가 반복되면, 그건 습관이 된다. 습관이 오래되면, 기능은 퇴화한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다. 자주 쓰지 않는 근육은 굳는다. 미루는 근육을 자주 쓰고 실행하지 않다 보면 미루는 근육은 발달하고, 실행하는 근육은 퇴화하고 점차 무뎌진다. 처음에는 나중에 하면 할 수 있지였는데 막상 시작하면 실행하지 못할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근육운동을 시작하려 한다.
5. 선언
나는 롤이라는 게임을 가끔 즐긴다. 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탱커가 필요하다. 지금의 내가 앞에서 한 대라도 더 맞고 앞으로 나가야 뒤에 있는 딜러들이 마음껏 활약할 수 있다.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불편한 걸 부딪히고 앞으로 나아가야 미래의 내가 마음껏 딜을 넣을 수 있는 무대가 펼쳐진다.
완벽하게 회피하지 않는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미루고 망설이고, 또다시 갚아 나가던 회피라는 대출의 상환을 연기할 수도 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쑥스럽고, 가끔 실패해도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벅뚜벅 마치 사이온처럼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오늘 나는 나의 문맥에 회피하지 않는다라는 변수를 선언하려 한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온 사이온이라는 롤 캐릭터의 궁극기 '멈출 수 없는 맹공'이다